태권도 반세기

 

각론 되는 바와 같은 엄연한 사실 때문에 견강부회(牽強附會)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태권도 역사가 재정립되어야 합니다. 태권도를 유구한 5000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 고유의 전통 무도(예)라고 주장하는 것은 정보통신(IT) 사회인 현시점에서는 허구입니다.

 

발전(세계화)이란 명분을 내세워 앞만 보고 달려왔다면 이제는 내실을 다져야 합니다. 모방도 창조입니다. 가라테를 모체로 근대 무술로 시작된 태권도가 스포츠라는 성격으로 세계화된 것 그 자체로 태권도는 우리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이제는 세계화된 태권도가 태권도 본연의 모습인 무도(태권도)로서 새롭게 태어나 무도태권도로 다시 세계화된 태권도(무도)의 참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총 68회에 걸쳐 '관을 중심으로 살펴본 태권도 형성사','태권도 반세기','태권도 現代史','노병직 관장의 친필 서한'을 참고로 해방과 더불어 태동 돼 현재에 이른 태권도의 근대사를 재구성(편집)해 각론 합니다.

 

 

태권도 태동과 분열

 

" 저 친구가 누구야, 힘이 장사 아닌가 "

( 무적의 태권인 – 최영렬 )

 

태권도계가 1962년 ‘태수도’라는 이름으로 협회를 결성하고 본격적인 경기화의 흐름을 타기 시작하던 1960년대 초반 전북 전주에는 태권도계의 천하장사 환생이라 할만한 인물이 등장(탄생)했다고 회자하였습니다.

 

그 주인공은 최영렬(교수)이었습니다. 태권도 수련체계(기술)는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압도적인 힘으로 상대를 제압했던 최영렬은 가히 태권도계의 천하장사란 별칭을 들을 만했습니다. 해방둥이(1945년 출생)인 그는 전주 태생으로 전주 명문고인 전주고 출신으로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태권도를 수련했습니다.

 

최영렬은 전주를 기반으로 하는 무덕관(계열)의 전일섭 관장이 창관(설)한 도장에서 ‘유병용’ 사범에게 태권도를 수련(사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도 기골이 장대한 최영렬(교수)은 어린 시절(중학교) 입시 준비(고등학교)를 하면서 집 마당에 철봉대를 만들어 놓고 체력단련을 해 태권도에 입문하기 전에 이미 체력적으로 천하 장사급의 체격을 갖췄습니다.

 

그런 그가 태권도에 입문해 당시의 대세였던 겨루기 시합에 나서자 그의 체격(신장)에 상대는 시작도 전에 주눅이 드는 형국이었습니다.

 

당시 한국 사람 체격(신장)이 160cm 정도가 보통이었는데 최영렬은 고등학생 시절 이미 신장이 180cm에 달하는 거구로 가히 경기(시합)에서 상대가 주눅이 들만한 체격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장신(거구)에다 근육질의 당당한 체격은 경기(시합)하기도 전에 상대가 주눅이 들기에 충분했습니다.

 

월등한 체격으로 별다른 기술(태권도)없이도 경기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워낙 장신(거구)이다 보니 화려한 발차기 기술을 구사하지 않고도 승리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최영렬의 주특기는 닛봉이라는 기술이었습니다.

 

이 기술은 상대의 공격(발차기)을 막기(아래)로 걸고(막고)서 주먹 또는 앞차기(발차기)로 상대의 명치 급소를 공격하는 기술로 공포의 닛봉이란 별칭(명성)을 얻었습니다.

 

당시 전주(지도관)에는 최영렬과 쌍벽을 이루는 태권도 선수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이승완입니다. 최영렬보다 5년 연배(선배)인 이승완은 최영렬이 경기장에서 두각을 나타낼 때 이미 선수 생활을 접고 출신학교인 전주고 코치를 하면서 전북체육관을 개관해 제자들을 양성하고 있었습니다.

 

최영렬은 고교에 입학하자마자 태권도에 입문(수련)했고 9개월 만에 초단에 승단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태권도 수련과 관련한 일화 중에는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3급 때 7명과 당시 시합 겨루기 방식으로 대련(겨루기)했는데 7명 모두를 KO 시켰다고 합니다.

 

이 일화는 최영렬이 경기(겨루기)에서 닛봉 기술을 사용하여 절대 강자가 되는 상황을 뒷받침하는 것이라할 수 있습니다. 당시 닛봉 기술의 신화 같은 존재는 최영렬뿐만이 아니라 이승완도 마찬가지였다고 전해 집니다. 이승완 또한 일본과의 친선경기에서 이 기술로 일본 가라테 선수를 제압했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당시는 초단(1단)만 되어도 고단자라 불렀습니다. 최영렬은 전북체육관에서 고단자 중에서 제일 실력이 뛰어났다는 3단과 맞붙었는데(대련) 서로 비등비등해서 승부를 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최영렬은 이 대련(3단과의 대련) 덕분에 태권도(수련)에 자신감이 생겨 선수 생활을 하게 됩니다. 3단 고단자와의 도장 내 겨루기가 최영렬의 인생 갈림길이 된 것입니다. 그가 태권도에 전념하지 않았다면 명문대에 진학해 아마도 다른 길(정치)을 가지 않았을 까라는 생각을 필자는 합니다.

 

당시는 어느 집안이나 부모들이 바라는 것은 공부에 전념하길 바라던 시절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최영렬은 고교 시절 공부보다는 운동에 더 관심을 가졌습니다. 최영렬은 투원반, 투창 등에도 실력이 인정되어 선수로도 뛰었다고 합니다.

 

그의 앞차기에 이은 주먹 연타(명치급소) 기술(동작)은 당할 자가 없었습니다. 당시 선수 보호를 위해 대나무 호구를 착용하고 경기(시합)를 했는데 대나무 호구를 착용했어도 그의 앞차기나 주먹에는 모두가 KO를 당하기 일쑤였습니다.

 

말 그대로 공포의 닛봉(기술)이었습니다. 반면 대나무 호구 때문에 경기(시합)가 있을 때마다 주먹은 피투성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최영렬은 대회(경기)에서 패한 경험이 없는 것으로 전해 집니다. 고3 때(1963년)는 국가대표에 선발돼 대선배인 이승완. 조점선. 이문성. 김일식. 안대섭 등과 함께 같은 해 7월에 일본에서 일본 공수도와 친선경기를 합니다. 당시 감독은 노병직(관장), 주무 및 섭외는 이금홍, 주장은 이승완이었습니다.

 

일본 원정(?) 대표단은 해방과 더불어 창관(창설) 된 5개 기간 도장의 시조들이 가라데를 수련한 일본 중앙대 권법부와 맞붙었는데 원정 대표단 선수들이 모두 이겼다고 합니다. 당시 경기는 주먹 지르기와 발차기는 물론 공격해 오는 상대를 걸어(잡아) 넘기는 기술도 허용됐습니다.

 

국내 태권도(태동기 태권도)는 주먹지르기 기술(명치공격)에 꽂아 차기(앞차기) 기술을 가미한 닛봉 기술이 대세여서 주먹 기술 위주의 가라데와는 달리 파괴력 있는 발차기를 주로 구사하는 발전된 기술체계(무도)로 가라데를 모체로 시작된 태권도였지만 가라데와는 다른 기술 체계로 발전돼 있었습니다.

 

최영렬의 앞차기(꽂아차기)는 일본 가라테 선수들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공포의 발차기 기술로 가라데의 발차기 기술과는 상대가 안 되는 기술이었고 이승완의 앞차기와 조점선의 뒤차기 기술은 가라데에서는 실전에서 시도해 볼 엄두도 내지 못할 가공할 신기술이었습니다.

 

대표단은 경기 후 번외 경기(시합)로 중앙도장에서 시범 및 시합(친선겨루기)을 가졌고 일본 한무관에서도 시합(친선경기)을 가졌는데 가라데의 주먹지르기 기술이 빠르기는 하나 이미 파괴력을 갖춘 경기화 된 발차기 기술체계(발차기)가 우세하다는 판정(결론)을 받았습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2년 후인 1965년에도 김용채 단장, 박해만 코치, 이금홍 주무 등을 중심으로 다시 대표단을 구성해 일본 원정전을 펼칩니다. 국내에서의 본격적인 경기화(태권도대회)는 1963년 10월 24일 전주에서 열린 제44회 전국체육대회에 시범종목으로 채택되면서입니다.

 

다음 29부에서는‘최홍희의 태권도계 복귀’에 대해 각론합니다.

 

태권도정보연구소 / 청호태권도장 / 신성환 관장

 

태권도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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