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 반세기

 

각론 되는 바와 같은 엄연한 사실 때문에 견강부회(牽強附會)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태권도  역사가 재정립되어야 합니다. 태권도를 유구한 5000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 고유의 전통 무도(예)라고 주장하는 것은 정보통신(IT) 사회인 현 시점에서는 허구입니다

 

발전(세계화)이란 명분을 내세워 앞만 보고 달려 왔다면 이제는 내실을 다져야 합니다. 모방도 창조입니다. 가라테를 모체로 근대 무술로 시작된 태권도가 스포츠라는 성격으로 세계화된 것 그 자체로 태권도는 우리의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이제는 세계화된 태권도가 태권도 본연의 모습인 무도(태권도)로서 새롭게 태어나 무도태권도로 다시 세계화된 태권도(무도)의 진면목을 보여야 합니다.

 

  

 

총 68회에 걸쳐 '관을 중심으로 살펴본 태권도 형성사','태권도 반세기','태권도 現代史', '노병직 관장의 친필 서한'을 참고로 해방과 더불어 태동돼 현재에 이른 태권도의 근대사를 재구성(편집)해 각론 합니다.

 

멈출 수 없는 태권도 통합

 

5․16 군사쿠데타는 우리나라 사회․경제․문화 등 전 분야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태권도계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포고령 제6호 사회단체 재등록에 관한 포고령에 따라 문교부는 유사단체 통합을 서둘러 1961년 7월 12일 공문으로 ‘대한수박도회’‘대한태권도협회’‘공수도 창무관’‘공수도 송무관’ ‘강덕원 무도회’‘한무관 중앙공수도장’ 등의 대표들을 소집시켜 통합회의를 수차례 가졌으나 각 관의 이해관계가 얽혀 결실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통합을 위한 진행이 순조롭지 못하자 당시 '옵서버' 자격으로 참석했던 이종우는 발언권을 얻어 다음과 같이 제안(발언)을 합니다.“정부관리 앞에서 무도를 한다는 사람들이 제각기 자기 이익만을 내세우며 회의를 공전시키는 꼴이 너무 부끄럽습니다. 앞으로 보름동안 여유를 갖고 자율통합 안을 내자”고 건의(제안)을 한 것입니다.

 

이종우의 건의에 따라 각 관의 대표들은 각자의 이해상관에 의해 삼삼오오(합종연횡) 짝을 지어 논의한 결과 지도관 윤쾌병, 청도관 엄운규, 창무관 이남석, 무덕관 황기, 송무관 노병직, 오도관 남태희, 강덕원 박철희, 한무관 이교윤 등과 한국체육관 이종우, 오도관 고재천, 송무관 이영섭 등이 옵서버 자격으로 참관(배석)하여 1961년 9월 14일 한국체육관에서 통합회의를 갖습니다.

 

당시 통합과정은 이른바 '태권도 1세대'인 노병직, 윤쾌병, 황기 등과 이들의 제자격인 이종우, 엄운규, 이남석, 현종명, 남태희, 박철희 등 ‘2세대’ 간의 이해관계를 좁히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이때 통합 전면에 나섰던 사람들은 1세대인 황기, 노병직, 윤쾌병과 태권도 2세대격인 이종우, 엄운규, 이병로, 홍종수, 송태학 등이었습니다.

 

 

당시 협회 통합은 30대 초반의 혈기왕성한 이종우, 엄운규 등을 주축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윗사람들(1세대)이 통합을 이야기하면서도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식으로 하다가 여의치 않으니 그래 너희들이 할 테면 해보라는 식으로, 좋게(선의)표현해 후배들(2세대)에게 양보의 미덕(?)을 보인 것이라고 할수 있겠으나 여기에는 각자의 이해상관에 얽혀 있는‘인익재권’이 내포돼 있습니다.

 

여하튼 2세대들이 협회구성에 성공할 듯하자 막바지에 가서 흑심(?)을 들어내는‘종신제 최고 위원직’을 들고 나와 협회통합에 걸림돌이 되는 상황(?)이 됩니다.

 

이런 상황과 관련하여 홍종수는 “이종우, 엄운규, 이남석, 송태학 등과 회동을 갖고 심사권 문제 등 통합과 관련한 제반 실무회의를 가졌다.며 통합단체 주체가 된 우리세대(2세대)와 선배들(1세대) 간의 견해차를 어떻게 조율하느냐가 민감한 과제였다고 생전에 술회했습니다.

 

다음은 1961년 9월 10일 통합회의의 일부분(한국체육관 지도사범 이병로가 기록)으로 회의록 원문은 영상 끝부분에 첩부합니다.

 

회의록 부분 발췌(임시의장 노병직)

 

⊙ 노병직이 임시의장으로 회의를 주관합니다. 노병직은 먼저 “참관인(업서버)의 발언권과 결의권에 대하여 제안해 주세요” 라고 발언하자 참석자 모두는 “발언권은 주어도 결의권을 주지 않는 것”으로 하자고 해 발언권만 주는 것으로 결론합니다.

 

⊙ 이어 노병직이 윤쾌병을 의장으로 선출했으면 좋겠다고 제안을 했고 투표를 한 결과 “윤쾌병 5표, 엄운규 1표, 기권 2표로 윤쾌병이 의장이 됩니다.

 

⊙ 의장이 된 윤쾌병이 서기를 선출해야하는데 한국체육관 공수도부 사범으로 있는 이병로를 추천하겠다고 제안을 하자 모두가 찬성을 해 ‘이병로’가 서기가 됩니다.

 

⊙ 이어 윤쾌병이 회의에 관한 “성원과 가결”문제를 묻자 “이남석이 의결은 출석인의 2/3로 하자고 제안 합니다. 이에 노병직이 회의의 성원은 출석인 2/3 ‘이상’으로 하고, 가결은 출석인원의 ‘과반수이상’으로 하자고 개의(改議)를 합니다.

 

⊙ 이에 황기가‘찬성’을 하고 이남석이 노병직 개의에 ‘동의’하고 자신의 제안을 철회해 노병직 안이 통과됩니다.

 

⊙ 이어서 윤쾌병이 ‘창립위원(회) 선출과 관련하여 인원수와 방법을 제안해 달라고 하자 “이종우가 대표권 선출문제에 있어서 각도 소재의 각관 도장별로 총괄 대표를 한 명씩 선출해 선출된 사람 중에서 도 대표의원 0명을 재 선임해 구성했으면 합니다”고 제안을 하자 박철희와 이종우가 제안에 동의합니다.

 

⊙ 이에 대해 이남석도‘동의’를 하며 “8개 도장 이내로 도장 확인(대표) 심사는 어떻게 합니까?”라고 하자 이종우가 조사단이 실지 답사를 하면 어떻겠습니까“ 라고 제안을 하고 황기가 좋다고 찬성을 합니다. 이어 노병직이 재청하고 윤쾌병(의장)이 이의 없으면 위 안을 채택한다고 하여 결정하고 창립위원(회)을 몇 명으로 구성하면 좋겠냐고 합니다.

 

이에 노병직이 7인이 적합하다고 제안하고 박철희가 찬성(동의)하고, 황기가 재청을 하는데, 남태희가 11인이 좋겠다고 개의를 합니다. 이에 이교윤이 찬성(동의)하자 윤쾌병(의장)이 이의 없냐고 묻어 이의가 없다고 하여 채택함을 선언합니다.

 

이어 선출방식에 대해서 안을 묻자 이남석이 연명으로 호칭 선출하되, 윤쾌병, 황기, 엄운규, 노병직, 박철희, 남태희, 이교윤 이상 7인으로 정할 것을 제안(동의)하고 정회합니다.

 

9월 16일에 이어진 2차(?) 통합회의에서 지난번(6일전 한국체육관) 회의에서 창립위원을 7인으로 한 결정(?)에 대해 논란이 벌어집니다. 7인이라는 숫자에 대해 불만을 엄운규가 제기 합니다.

 

7인 창립위원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선출한 것이냐?고 물었고 이에 대해 노병직이 이종우가 제안한 것을 내가 받아들여 동의한 것이라고 설명했으나 분위기가 여의치 않자 자신(노병직)의 당초 제안을 철회하는 해프닝(?)이 벌어져 다시 논의를 합니다.

 

윤쾌병(의장)이 노병직 자신이 동의한 것을 철회했는데 그(노병직)의 의견에 찬성한 박철희와 재청한 황기는 어떤지 의견을 묻자 황기도 다른 분들이 권유한다면 철회하겠다고 했으나, 박철희는 “7인 위원회 구성은 기간도장을 떠나 어디까지나 인물 위주로 선출한 것입니다. 상황에 따라선(본인) 7인 위원회에서 물러날 용의가 있지만”‘철회’는 하지 않는다고 철회를 하지 않음을 밝힙니다.

 

이런 난감한 상황에서“7인위원회”안은 박철희가 자진 퇴장한 가운데 만장일치로 무효화 처리됩니다. 이에 의장인 윤쾌병은 인위(人委)구성을 인물 위주로 할 것인지 아니면 기간도장별로 정할 것인지 묻자 엄운규가 기간도장 위주로 선출하자고 했고, 남태희가 찬성합니다.

 

하지만 이 안에 대해서 이번에는 황기의 생각이 달랐습니다. 황기는 이남석이 제안한 5개 기간도장(청도관, 지도관, 창무관, 무덕관, 송무관)과 군부도장 1명을 대표로 선출하자고 개의를 합니다. 또 한 남태희는 1959년 9월 30일 한국체육관에서 회합(會合)한 발기인 12인 중에서 6인을 줄여서 선출하자고 재개의를 합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엄운규가 자신을 포함해 윤쾌병, 황기, 노병직, 남태희, 이남석 등 6인으로 하자고  제의하고 이에 전원이 만장일치로 통과시킵니다. 이렇게 해서 당초 선출했던 창립위원 7인을 결정한 지 6일 만에 6인으로 재구성 하는 해프닝(?)을 격습니다.

 

다음으로 문제가 된 안건은 협회 명칭이었습니다

 

남태희가(1959년 대한태권도협회를 염두해 둔 듯) 태권도로 하자고 하자 엄운규가 찬성(동의)합니다. 하지만 이남석은 명칭에 대해서는 신중을 기해야 하니 가칭으로 ‘공수도’로 하자고 개의를 합니다.‘공수도 창무관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습니다. 이 말에 황기가 찬성했고, 노병직이 재청을 해 의결합니다.

 

이날 회의에서는 이사를 11명으로 결정하고, 도(道) 대의원을 2명으로 결정합니다. 9월19일 한국체육관에서 열린 회의는 노병직이 의장이 되어 회의를 진행했으나 임원선출과 명칭을 놓고 난상토론이 벌어진 끝에 결론을 내지 못하고 정회합니다.

 

다음날 다시 한국체육관 회의실에서 지도관 윤쾌병, 무덕관 황기, 청도관 엄운규, 송무관 노병직, 오도관 남태희, 창무관 이남석이 각 관 대표로 참석하고, 한국체육관 이종우, 한무관 이교윤, 강덕원 박철희 등이 참관인(업서버)으로 참석한 가운데 임원(진)선출 방법을 놓고 회의(격론)을 다시 합니다.

 

윤쾌병이 감사를 제외한 전체 임원을 선출하되 구두호선(지명)으로 하자고 하자, 황기가 이사장, 회장, 부회장은 후보를 내세워 투표로 결정하자고 제안하고 엄운규가 찬성(동의)을 합니다.

 

⊙ 윤쾌병(의장)은 황기, 나(윤쾌병), 노병직, 최홍희 이상 4인은 임원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표명하면서 후진들에게 길을 열어주겠다고 하자 황기가 찬성을 합니다. 하지만 남태희가 “네 분의 공로가 지대함을 찬양하며 태권도 발전을 위하여 유임해 주실 것을 제안합니다”라고 하자, 윤쾌병이 아주 떠나는 게 아니라고 하고, 황기 또한 남태희의 말은 참 좋은 말이지만 우리들로서는 해놓은 것이 없고 도리어 '암'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꽁무니 빼는 것이 아닙니다. 통합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겠습니다. 라고 관철을 하자,

 

이남석이 문제는 노장들(1세대)이 물러나고 소장(2세대)들이 감당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소장들이 의논을 하겠으니 시간을 주십시오. 라고 제안을 합니다.

 

⊙ 이에 대해 황기는 소장파에서 회장이 나오면 되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자, 이남석이 회장 자리는 당분간 그냥 두고, 4인을 제외하고 이사를 선정해, 회장단 선출은 이사진에 전권을 위임할 것을 제안합니다.라고 발의를 합니다.

 

이에 황기가 이의 없습니다. 라고 재청을 하자 윤쾌병이 소장파에 전권을 주되 4명은 회장단에 넣지 말 것을 제안합니다. 라고 하자 황기가 다시 찬성합니다. 라고 동의를 해 통과를 시킵니다.

 

이사장은 윤쾌병의 동의에 따라 만장일치로 ‘이남석’이 선출됐고, 6인 위원회에서 추천된 오세웅, 박철희, 이종우, 이교윤, 이영섭, 송태학, 김순배, 현종명, 남태희, 고재천 등 11명의 이사를 선출합니다.

 

이어서 협회 명칭 문제는

 

남태희가 먼저 강한 어조로 '59년 회합 때도' 만장일치로 태권도로 정한 적이 있으니 태권도로 합시다. 고 제안했다. 엄운규가 즉시 찬성했으나 윤쾌병은 당시 문교부가 결정했다고 해서 따른 것이지 만장일치로 결정한 것은 아니다. 며 그러면 우리도 공수도를 고수하겠다. 고 맞섭니다.

 

공수도가 국제적인 명칭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인데 노병직, 이남석도 윤쾌병의 의견에 동의를 합니다. 찬반논쟁이 가열되자 윤쾌병이 태권도의 '태' 자와 공수도의 '수' 자를 합친 ‘태수도’로 하자고 중재안(?)을 개의합니다.

 

이 명칭을 표결에 붙인 결과 6대 4로(기권2)으로 통과가 되고 회의를 마치게 됩니다. 다음 통합회의는 9월 22일 창무관 회의실에서 이남석, 이종우, 이교윤, 박철희, 오세웅, 이영섭, 송태학, 김순배, 현종명, 엄운규, 고재천 등이 참석해 열립니다. 1차 이사회를 겸한 회의였습니다.

 

대내 인사로 하자고 결의하고 부회장 선거에 들어갔는데 이종우가 9표, 엄운규가 5표를 얻어 초대 부회장으로 이종우가 선출됩니다.

 

참고로 현종명 3표, 박철희와 이영섭은 각각 2표씩을 얻었습니다. 이어 상임이사, 이사, 감사를 선출되자 박철희가 이왕 이사회를 구성하고 부회장까지 선출했는데 회장 선출을 굳이 문교부에 넘겨줄 이유가 있느냐?

 

이남석 이사장과 이종우, 엄운규 부회장이 합당한 인물을 선출할 수 있도록 권한을 위임하는 것이 어떻겠는가?라는 의견을 내 앞서 추인된 문교부에 회장 선출권한을 위임하는 것을 뒤집고 이사회에 위임하는 것으로 재 추인을 받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태권도계는“1961년 9월 22일” 드디어 명실상부하게 통합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다음 22부에서는‘최홍희의 조바심’에 관해 각론합니다

 

태권도정보연구소 / 청호태권도장 / 신성환 관장

 

태권도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http://www.riti.net - 태권도정보연구소
http://www.ctu.ne.kr - 태권도지도자교육

http://www.taekwondoforum.net - 태권도포럼

http://www.moodotaekwondo.com - 무도태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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