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 반세기

 

각론 되는 바와 같은 엄연한 사실 때문에 견강부회(牽強附會)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태권도  역사가 재정립되어야 합니다. 태권도를 유구한 5000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 고유의 전통 무도(예)라고 주장하는 것은 정보통신(IT) 사회인 현 시점에서는 허구입니다

 

발전(세계화)이란 명분을 내세워 앞만 보고 달려 왔다면 이제는 내실을 다져야 합니다. 모방도 창조입니다. 가라테를 모체로 근대 무술로 시작된 태권도가 스포츠라는 성격으로 세계화된 것 그 자체로 태권도는 우리의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이제는 세계화된 태권도가 태권도 본연의 모습인 무도(태권도)로서 새롭게 태어나 무도태권도로 다시 세계화된 태권도(무도)의 진면목을 보여야 합니다.

 

  

 

총 68회에 걸쳐 '관을 중심으로 살펴본 태권도 형성사','태권도 반세기','태권도 現代史', '노병직 관장의 친필 서한'을 참고로 해방과 더불어 태동돼 현재에 이른 태권도의 근대사를 재구성(편집)해 각론 합니다.

 

갈등 및 분열

 

“跆拳道”라는 명칭의 등장

 

태권도라는 명칭은 최홍희의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태권도란 명칭은 최홍희가 창안하기 전까지는 한국 무도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최홍희가 태권도라는 명칭에 착안한 것은 자신이 이끌던 29사단이 이승만 대통령 앞에서 당수도 시범을 보인 것에서 출발해 근대 무술로 태동된 태권도의 한 획을 긋는 우리 무도의 ‘역사적 이정표'가 되는 계기가 됐습니다.

 

1953년 9월 최홍희는 제주도에서 창설된 29사단 초대 사단장직을 맡게 됩니다. 태권도(당수도, 공수도)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던 최홍희는 움켜 쥔 주먹을 29사단 마크로 정하면서 태권도를 부대 훈련의 기본으로 삼았습니다.

 

최홍희는 당수도 2단인 부관 남태희(중위)와 1급인 한차교(하사)를 사범으로 임명하고 전 장병들에게 태권도(당수도)를 가르치므로(보급) 29사단은 무술적 격투술을 갖춘 강군의 기틀(정신적 무장)을 이뤘다고 할 수 있습니다.

 

29사단은 기본 훈련(신병훈련)을 마치고 이듬해 6월 강원도 설악산 부근 오호리로 이동하게 되고 9월에 이승만 대통령 앞에서 부대 창설 1주년 기념식을 갖습니다.

 

기념식에서 29사단의 자랑거리인 부대원 모두의 당수도 시범을 보였습니다. 부관 남태희가 기와 13장을 일격에 격파하는 상황을 지켜보던 이승만은 “저게 바로 옛날부터 있었던 우리의 ‘택견’이 아니냐며 감탄했다고 합니다.

 

“군인들이 저것을 배워야 해, 서양 사람들은 키가 크고 힘이 센데 발로 차면 힘없이 쓰러질것이 아닌가?라고 하면서... 이승만 앞에서 보인 사단시범은 최홍희 장군이 이승만의 총애를 받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던 것입니다.

 

이승만의 신임(총애)을 얻은 최홍희는 일본 무술인 당수도와 공수도라는 명칭을 우리의 무도(술)명칭으로 바꾸려는(명명) 생각을 항상 갖고 있었기 때문에 보인 시범이 기회가 되었고 이승만의 인정으로 기회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명칭을 무엇으로 할까라는 고민을 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이 언급한 ‘택견’이라는 말과 느낌(어감)이 비슷해야 한다는 생각에 두 번째 글자를 ‘권’ 으로 정(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고민은 최홍희의 독자적인 생각에서 시작된 것일 수 있으나 결과적으로는 부관 남태희와의 교감(합작품)에 의한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태권’이란 명칭이 창안되는 과정은 여러 정황으로 유추해 보면 이러 했을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당시(태동기태권도) 관행으로는 무도(술)라 함은 명칭에 수(手) 또는 권(拳)이 들어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따라서 택견과 비슷하기 위해서는 우선권자가 적합했을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태동기 태권도 분위기와 맞는 적당한 명칭(글자)을 찾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 명칭이 ‘택’ 과 ‘태’가 아니었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한학에 조예가 깊었던 최홍희는 ‘태’ 자(字)를 토파 해 나갔을 것입니다. ‘太(클태)’도 있고, ‘泰(크다)’도 있고, ‘怠(게으를태)’도 있고, ‘胎(잉태)’도 있고, ‘跆(밟다)’도 있습니다. 많은 ‘태’ 가운데 어떤 ‘태’ 자를 쓸 것인가를 고민 하다가 최종 선택한 명칭(글자)이 ‘跆(밟다)’였을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부관인 남태희의 역할이었다는 것이 알려진 사실로 태권도란 명칭은 알려진 것처럼 최홍희의 작품(?)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명칭을 창안한 것은 남태희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태권도란 명칭을 전적으로 최홍희 작품이라고 하는 것 보다는 최홍희와 남태희의 합작품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 할 것입니다.

 

작금의 태권도계에서 회자되는 이동섭이 국기태권도를 법제화해서 태권도를 국기태권도로 지정했고 그 업적을 자신의 업적이라고 홍보를 하는데 실제로는 ‘국기태권도’란 말이 법제화되어 있지 않음을 인지한 ‘최제춘’이 ‘국기태권도’로 법제화해야 한다는 것을 최초로 주창했고,

 

이동섭은 비래대표 국회의원으로서 발의를 하고 여러 국회의원들이 동조하여 입법화 한 것으로 이동섭이 자신의 전적인 업적으로 포장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과 같이 ‘태권도’란 명칭의 제창자도 같은 맥락에 있는 것이라 필자는 생각합니다.

 

‘跆’라는 글자는 최홍희가 발견해(?) 무술계에 끌어들이기 이전에는 무술과는 전혀 관계가 없던 글자였습니다.'跆'에는 최홍희가 원했던 발로 찬다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 않습니다.

 

굳이 풀이를 한다면 ‘발로 밟는다는 의미가 있을 뿐이며, 이 밟는다는 것도 무도(술)와 관계된 것이 아니라 가볍게 스텝을 밟는 동작을 표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跆’자는 문헌상으로 지극히 쓰임새가 희소한(없는) 글자입니다(필자생각). 하지만 태권도란 명칭의 탄생과 현 태권도에 있어서 이 명칭(글자)이 갖는(부여된) 의미는 가장 부합하는 명칭이라고 생각합니다.

 

‘跆’자가 갖는 의미는 무도(태권도)에 있어서 가장 태권도(무도) 성격에 맞고(발을 쓰고 주먹으로 지른다는 점에서) 발음상으로도 이승만 대통령이 말한 ‘택견’에 가까운 관계로 1955년(4월11일)에 태권도라는 명칭이 탄생됩니다.

 

태권도란 명칭을 공론화를 하는 것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습니다(태권도반세기). 최홍희는 무언가 자신이 도모하는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관계자들을 불러 모아놓고 술판부터 벌여 관철시키는(녹여내 는) 스타일이었다고 합니다.

 

태권도라는 명칭을 염두에 둔 최홍희는 이를 기정사실화(현실)하고자 자신의 뒷배경이었던 이형근 장군의 힘을 빌려 정계 실력자와 언론계 인사들을 ‘대한당수도 청도관 제1고문회’라는 이름으로 요정에 불러서 성대한 저녁을 대접합니다.

 

어느 정도 술이 오고간 후 “작금 국내 무도계는 같은 무도를 놓고 당수, 공수, 권법 등 제각각 이름을 내걸며 파벌을 형성하고 있어 혼란이 극심하니 이것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새로운 명칭을 제정할 필요가 있다고 운을 떼었다고 합니다.

 

당시 제3구 사령관이었던 최홍희의 초청을 받은 인물들은 유화청(미창사장), 손덕성(청도관장), 이형근(연합참모총장 육군대장), 조경규(국회부의장), 정대천(민의원), 한창완(정치신문사장), 장경록(정치신문 주간), 홍순호(공익통상 부사장), 고광래(동아일보 주간), 현종명(청도관 사범)등이었습니다(태권도반세기).

 

참석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모든 계파들이 인정할 만한 새로운 명칭이 있느냐?"고 하자 최홍희는 기다렸다는 듯이 태권도라는 이름을 꺼냈다고 합니다. ‘태’자는 발로 뛴다, 또는 밟는다는 뜻으로 ‘권’자와 합치면 발과 주먹을 구사하는 이 무도(태권도)의 성격에 잘 부합하는 명칭이라고 풀이를 하고 또 한 ‘태권’이라는 이름은 음운상 ‘택견’과도 흡사하니 역사적(전통) 측면에서도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참석자들 중 유화청이 "나는 최홍희 장군이 제안한 ‘태권’ 이란 명칭을 전적으로 찬성합니다. 다만 한 나라의 무도에 관한 명칭을 제정하는데 국가원수인 이승만 박사의 승인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라는 일종의 제청 발언을 하고 나섰다고 합니다.

 

유화청의 의견에 따라 태권도라는 명칭을 잠정적으로 결성하되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확정짓기로 합니다. 그런데 대통령 재가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29사단 시범에서 본 당수도가 옛날 ‘택견’이라고 굳게 믿고 있던 이승만이 ‘태권도는 무슨 태권도야, 택견이 좋지’라고 하며 재동(택견이란 명칭을 고집)을 건 것입니다.

 

이에 최홍희는 이승만을 지근에서 모셨던 경무대 실력자들을 또 다시 요정에 불러놓고 대통령 휘호는 한자로 써야지 한글로 쓰면 멋이 안 난다는 등 갖은 ‘감언이설(?)로 설득해 드디어"跆拳道"라는 휘호를 받아 낸 것입니다.

 

최홍희는 대통령 재가가 나자마자 자신의 휘하에 있던 오도관과 청도관에 걸려 있는 당수도 간판을 떼고 ‘태권도’로 바꿨습니다. 또 태권도를 수련하는 군인들이 경례를 할 때는 “태권”이라는 구호를 복창하게 했습니다(태권도반세기).

 

 

이런 과정을 거쳐 현재 세계화된 스포츠 무술인 태권도란 명칭이 탄생하고 발전을 해 세계인들이 수련하는 무술이 된 것입니다.

 

다음 20부에서는‘최홍희가 만든 초기 대한태권도협회’에 관해 각론합니다

 

태권도정보연구소 / 청호태권도장 / 신성환 관장

 

태권도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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