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 반세기

 

각론되는 바와 같은 엄연한 사실 때문에 견강부회(牽強附會)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태권도  역사가 재정립되어야 합니다. 태권도를 유구한 5000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 고유의 전통 무도(예)라고 주장하는 것은 정보통신(IT) 사회인 현 시점에서는 허구입니다

 

발전(세계화)이란 명분을 내세워 앞만 보고 달려 왔다면 이제는 내실을 다져야 합니다. 모방도 창조입니다. 가라테를 모체로 근대 무술로서 시작된 태권도가 스포츠라는 성격으로 세계화된 것 그 자체로 태권도는 우리의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이제는 세계화된 태권도가 태권도 본연의 모습인 무도(태권도)로서 새롭게 태어나 무도태권도로 다시 세계화된 태권도(무도)의 진면목을 보여야 합니다.

 

 

 

총 68회에 걸쳐 '관을 중심으로 살펴본 태권도 형성사','태권도 반세기','태권도 現代史', '노병직 관장의 친필 서한','김호재 학감, 김용길 관장의 증언'을 참고로 해방과 더불어 태동돼 현재에 이른 태권도의 근대사를 재구성(편집)해 각론 합니다.

 

갈등 및 분열

 

청도관과 오도관의 밀월, 그러나

 

태동기 태권도 기간도장들의 분열과 갈등에 있어서 1959년 청도관의 내분과 관련한 “청도관 과 오도관의 갈등”도 주목할 대목(상황)입니다. 오도관은 최홍희가 29사단 사단장으로 이승만의 총애를 받으며 한창 위세를 떨치던 1954년에 전 군(국군)에 태권도를 보급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갖고 출범시킨 관(태권도)입니다.

 

그 과정에서 최홍희의 최측근(보좌관)인 남태희가 이원국으로부터 태권도를 배운 청도관 출신인데다 백준기, 한차교, 우종림, 고재천, 김석규, 곽근식 등 오도관 소속 맹장(장군?)들 역시 청도관 출신이라는 점에서 오도관과 청도관은 거의 형제지간의 관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최홍희 장군이 청도관과 인연(관계)를 맺게 되는 상황에 대해 숨겨진 비사는 최홍희가 부산 동래에서 육군종합학교 교수부장으로 재직하던 1951년 초 이원국이 손덕성을 대동하고 그를 찾아와 청도관을 맡겼다는 것입니다.

 

이 상황에 대한 최홍희의 주장은 “이원국은 자신의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일본에 가게 됐는데 다시 돌아오기가 어려울 것 같으므로 청도관을 맡아 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입니다.

 

맡기게 되는 이유는 후에 알게 된 상황으로 “이원국 관장이 1․4 후퇴 때 서울에 남아 있으면서 ‘청도관 옥상에 붉은 기를 거는’ 등 부역행위를 한 것이 알려져 일본 밀항을 결심한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합니다. 여하튼 최홍희는 오도관 창설과 거의 같은 시기에 청도관을 ‘인수해(?)’ 휘하에 두게 됩니다.

 

문제는 당시는 최홍희는 군인 신분으로 민간 태권도계 직책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청도관 관장직에 손덕성을 앉히고 자신은 명예관장을 맡습니다. 하지만 1959년 최홍희와 손덕성 간에 갈등이 생깁니다. 이것을 필자는 “청도관과 오도관의  밀월, 그러나”라고 표현 하는 것입니다.

 

“청도관과 오도관의 밀월, 그러나”에 관한 상황을 좀 더 부연하면, 1951년 1.4후퇴 이후에 이원국이 일본으로 밀항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대해 최홍희도 1950년 말 즈음에 이원국이 동래에 있는 육군종합학교로 손덕성과 함께 찾아왔다고 하고 있는 관계로 볼 때 1950년 6월 일본으로 밀항했다고 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이원국의 밀항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정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원국 스스로는 당시 자유당에서 청도관 제자들을 입당시키라는 요구를 거부했고, 그로 인해 이승만 대통령 암살 미수라는 누명을 쓰고 일본으로 밀항했다고 하기도 하고, 마포에서 북한군에 붙잡혀 심한 고문을 당한 직후 밀항 했다는 설도 있고, 인민군에게 잡혀 부역을 했던 사실이 우익들에게 탄로날까봐 일본으로 밀항(도주)했다는 설도 존재합니다.

 

부역한 일에 대해서는 최홍희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후일에 알았지만 이원국은 1.4후퇴 때 서울에 남아 있으면서 청도관 옥상에 붉은 기를 게양하는 동시에 그의 제자 엄운규와 함께 붉은 완장을 차고 부역한 것이 탄로되어 추방을 당한 것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하튼 손덕성이 관장직을 승계하게 됩니다. 최총희는 이원국이 일본으로 밀항하기 전인1950년 말 부산 동래에서 손덕성의 입회하에 이원국으로 부터 청도관을 인수 했으나 군인 신분이었기 때문에 일반사회의 직책을 가질 수 없는 관계로 손덕성을 관장으로 하고 자신은 명예관장이 되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런 청도관과 오도관의 밀월관계에서 사이가 멀어지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1958년 “동남아태권도시범단”을 파견할 때 단장을 맡게 해달라는 손덕성의 요구를 최홍희가 거절하면서 둘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합니다.

 

또 한 손덕성은 ‘대한태권도총본부’ 결성에서 자신을 사무장에, 당시 정계 실세였던 이재학을 회장에, 최홍희를 부회장에 편재합니다. 이는 최홍희를 공개적으로 망신 주자는 의도였던 것으로 필자는 판단합니다.

 

당시 태권도계의 실세였던 최홍희를 부회장에 편재한 것은 의도적인 것으로 최홍희가 자신에게 시범단장을 거절한 것에 대한 대응으로 최홍희의 자존심을 건드리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 직제에 대해 최홍희는 자서전인 “태권도와 나”에서 ‘대한태권도총본부’ 결성에서 조직의 편재나 기능에서 본인(최홍희)에게 한마디도 상의 하지 않고 한창완이 구성한 대로 조직을 발표하는 것에 놀랍고 자신을 배제하고 임의로 조직을 구성한 것에 마음이 상했지만 참기로 했다고 회고하고, 이런 내막을 알고는 손덕성을 관장직에서 물러나게 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련의 일들로 인해 최홍희와 손덕성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이 상황을 “청도관과 오도관의 밀월, 그러나” 라고 하는 것입니다. 손덕성과 최홍희의 갈등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 상황은 다음 회차 ‘배반의 시절 손덕성’에서 각론 합니다

 

태권도정보연구소 / 청호태권도장 / 신성환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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