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 반세기

 

각론되는 바와 같은 엄연한 사실 때문에 견강부회(牽強附會)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태권도 역사가 재정립되어야 합니다. 태권도를 유구한 5000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 고유의 전통 무도(예)라고 주장하는 것은 정보통신(IT) 사회인 현 시점에서는 허구입니다.

 

 

총 40회에 걸쳐 '관을 중심으로 살펴본 태권도 형성사','태권도 반세기','태권도 現代史', '노병직 관장님의 친필 서한','도산체육관 김용길 관장님의 증언'을 토대(참고)로 해방과 더불어 태동돼 현재에 이른 태권도의 근대사를 재구성(편집)해 각론 합니다

 

최초의 인물들

지도관의 쌍생아 - 한무관

 

전상섭의 제자였던 이교윤 관장이 창설(1956.08)한 ‘한무관’은 신생관의 선두주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수복된 서울로 돌아온 조선연무관 출신 수련자들(생)(수련자)은 전쟁 전처럼 소공동 연무관 건물에서 당수도를 가르쳤습니다.

 

소공동 연무관 건물에서 유도를 가르치던 이재황(대한유도회)이 이교윤, 이종우에게 퇴거를 요구하자 이교윤 관장은 평소 알고 지내던 을지로‘한국체육관 부관장 이상묵’을 찾아가 당수도를 가르치고 싶다고고 합니다.

 

당시 한국체육관은 서울에서 유일한 종합무술체육관으로 권투, 유도, 레슬링, 역도, 펜싱 등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한국체육관에서 ‘당수도부’를 개설한 후 1년 만에 2백여 명이 넘는 수련생을 확보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국체육관에 당수도부를 개설 한 후 윤쾌병 관장을 재 영입하는 과정에서 이종우 관장과 이교윤 관장이 갈등을 빚는 바람에 한국체육관의 당수도부가 폐쇄(휴관) 됩니다.

 

이교윤과 이종우의 갈등에서 이교윤은 조선연무관에 환멸을 느끼고 독립을 결심합니다. 갈등으로 인해 한국체육관을 휴관한 이교윤 관장은 서울 종로구 창신동 강문고등학교 뒤편 공터를 임대해 임시로 천막을 치고 ‘한무관 중앙본관’을 창설하면서 독립적인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공터에 군용 천막을 치고 운동을 하는 열악한 수련 환경이었지만 수련 강도는 엄격하고 강했던 것 같습니다. 주춤서기 한 동작만을 6개월 씩 반복 수련했다고 하는 상황과 승단 심사가 1년에 2회만 실시 됐다는 것이 수련 강도가 얼마나 강했는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한무관은 이교윤 관장의 뛰어난 지도력(수련)에 힘입어 관세가 확장됩니다. 1960년 7월 21일에 시공관에서 연무대회를 개최 할 정도로 관세가 확장되고 1961년 9월에는 서울 성동구 상왕십리 소재 광무극장 인근의 80평 대지 위에 5층 건물을 신축하여 천막 도장(수련)에서 벗어난 어엿한 중앙도장을 갖게 되며 1969년 10월 9일에 종로구 창신동에 중앙도장을 신축하여 이전 개관식을 갖습니다.

 

이교윤 관장과 결별한 이종우 관장은 1개월 후 한국체육관에서 윤쾌병 관장을 영입해 지도관이란 이름으로 재 개관합니다. 때문에 굳이 정통성을 따지자면 한무관은 지도관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무관이 분관되는 상황을 보면 지도관(조선연무관에서 지도관으로 명칭변경)과 함께 전상섭이 창설한 ‘조선 연무관’에서 갈라져(파생된) 나온 쌍생아인 셈입니다.

 

참고로 한무관 출신으로는 변동식, 이면형, 김철환, 이강환 등이 있었습니다.

 

다음 회에서는 ‘연세대학교 엘리트들이 결성한 강덕원’에 관해 각론합니다

 

태권도정보연구소 / 청호태권도장 / 신성환 관장

 

태권도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http://www.riti.net - 태권도정보연구소
http://www.ctu.ne.kr - 태권도지도자교육

http://www.taekwondoforum.net - 태권도포럼

http://www.moodotaekwondo.com - 무도태권도

金烏 신성환 - 이력보기 ☜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