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 반세기

 

각론되는 바와 같은 엄연한 사실 때문에 견강부회(牽強附會)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태권도 역사가 재정립되어야 합니다. 태권도를 유구한 5000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 고유의 전통 무도(예)라고 주장하는 것은 정보통신(IT) 사회인 현 시점에서는 허구입니다.

 

 

총 40회에 걸쳐 '관을 중심으로 살펴본 태권도 형성사','태권도 반세기','태권도 現代史', '노병직 관장님의 친필 서한','도산체육관 김용길 관장님의 증언'을 토대(참고)로 해방과 더불어 태동돼 현재에 이른 태권도의 근대사를 재구성(편집)해 각론 합니다

 

 

최초의 인물들

 

군인 최홍희 - 오도관(吾道館)

 

최홍희(崔泓熙)는 현대 태권도사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는 인물입니다. 태권도가 태생(성립)됨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으면서도 태권도계에서 가장 비판 받는 인물이 최홍희(장군)입니다.

 

비록 비판은 받지만 아마도 최홍희 장군이 없었다면 태권도 모습은 현재의 모습과 사뭇 다른 방향(길)으로 가지(발전)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필자는 합니다.

 

최홍희는 1918년 함경북도 명천군 하가면 하대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때 그는 체구가 작은데다 건강도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세간에 회자되는 최홍희의 일화 중에 허약한 체질이었던 최홍희는 어린 시절 산삼을 달여 먹고 몸이 튼튼하게 됐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체구는 작았지만 운동신경이 뛰어(발달)났고 고집이 엄청 셌고 무엇이든 한번 하고자 하면 꼭 해야만 하는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최홍희는 어린 시절 학교 공부에 관심이 적었다고 합니다. 학교 공부에 취미를 붙이지 못하자 부친은 당시 명필로 소문이 자자했던 서예가 한일동 선생에게 한학을 공부(배우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배우게 된 한문(한학) 실력과 서예 솜씨가 이후 최홍희 장군의 출세에 큰 영향을 주게 됩니다. 한일동(서예가) 선생에게 한학을 배우면서 택견도 같이 배웠(전수)다고 하는 설이 있는데 이 설에 대해서는 확인된 바가 없습니다.

 

최홍희(장군)는 투전(화투)판 사건으로 인해 가라데를 배우게 됩니다. 술과 담배, 도박을 즐겼던 최홍희는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일본행을 결심하는데 출발을 며칠 앞둔 어느날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투전(화투)판을 벌입니다.

 

그 투전판에서 돈을 가장 많이 딴 사람이 허씨라는 동네 건달(?)이었는데 최홍희는 일본에 갈 여비마저 다 잃어버리자 그에게 시비를 걸었고 그런 와중에 허씨에게 잉크병을 던졌다고 합니다. 던진 잉크병에 허씨는 얼굴을 맞고 기절해 버렸고 최홍희는 자신이 잃은 만큼의 돈을 뺏어 도망을 쳤다고 합니다.

 

동네에서 한가락 하던 왈패(건달)였던 허씨는 일본으로 도망(?)간 최홍희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복수를 벼르고 있었고 이 말이 일본에 간(1938년) 최홍희에게 전해졌고 최홍희는 겁이 나 고심에 찼다고 합니다.

 

겁이 난 최홍희는 고심 끝에 가라데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최홍희는 학교를 오가며(일본에서의 학교 생활) 나무로 된 전봇대를 대상으로 주목과 수도를 단련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전봇대가 지금처럼 콘크리트 전봇대가 아니라 나무 전봇대였습니다.

 

동경에서 일본 중앙대에 진학한 최홍희는 학도병으로 일본군대에 들어가 평양 근교에서 주둔하다가 해방을 맞습니다. 이때 최홍희 장군은 학도병들과 백두산으로 탈출할 계획을 세웠으나 발각이 되어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다고 합니다. 이 상황은 1989년 당국에 의해 확인된 바가 있다고 하는데 필자는 관련 상황(자료)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해방 후 서울로 돌라온 최홍희는 1946년 1월 국군이 창설되기 전 육군사관학교 역할을 한 군사 영어학교에 입학했고 3월 육군 소위로 임명되어 광주에 배속돼 군인으로서의 길을 시작합니다. 그 후 최홍희는 당시 군에 근무했던 사람들이 모두 그랬듯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여 1947년 여름에 소령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총사령부 정보 참모가 됩니다.

 

수년간 가라데를 수련한 최홍희는 근무지를 옮길 때마다 군(부하)인들에게 가라데를 수련시켰고 과시욕인지 정의감인지는 모르지만 수시로 인근 건달(깡패)들과 충돌 했습니다. 타무도(다른 도장) 수련생들과도 잦은 충돌을 한 것을 보면 군인으로서 호기와 과시욕을 부린 것이 아닌가 합니다.

 

최홍희는 대령 때인 1949년 6월 최덕신 대령과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전쟁이 나기 직전에 귀국했다고 합니다. 귀국해 전방지휘소 정보국장을 역임하는 등 전방에서 근무하던 중 1950년 8월 신설된 육군종합학교 부교장 겸 교수부장으로 발령(전보)됩니다.

 

이때 청도관의 이원국과 손덕성을 만나 민간태권도계와 처음 인연을 맺게 됩니다. 당시 이원국은 일본으로 가기 전 최홍희에게 잠시 청도관을 맡겼다고(명예관장) 합니다.

 

참고로 오도관을 청도관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오도관 관장을 지낸 최홍희가 이원국 청도관 관장으로부터 직접 배운(수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도관 창설과 유지(維持)에 청도관 출신들이 많은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청도관으로 부터 영향을 받은 관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남태희를 비롯해 백준기, 한차교, 우종림, 고재천, 김석규, 곽근식 등 청도관 출신들이 대다수를 차지했고 지도사범 또한 손덕성, 현종명 등 청관 출신이 주류를 이뤘다는 것을 바탕으로 영향을 받은 관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최홍희 장군은 1953년 9월 제주도에서 창설된 29사단장을 맡음으로 태권도 인생(태권도인)의 계기가 됩니다.

 

주먹을 부대 마크로 하는 등 부대원들에게 가라데를 열심히 가르쳤던 최홍희는 이듬해 부대 창설 1주년 기념식에서 이승만 대통령 앞에서 시범을 보입니다. 이것을 계기로 군대 내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했을 뿐 아니라 결국 태권도라는 명칭을 창안하게 됩니다.

 

대통령 앞에서 성공적인 시범을 계기로 자신감을 얻은 최홍희는 자신의 사단 내에 오도관을 창설합니다. 창설 초기에는 다른 기간도장과 마찬가지로 가라데(당수도)를 기반으로 하지만 오도관(최홍희) 나름의 품새인 화랑 및 충무형등을 창안(연구)해 완성시킴으로써 기존 기간도장과는 차별화된 자신(최홍의)의 무도(후일의 태권도)체계를 구축합니다.

 

태권도란 명칭의 실제 창안자는 최홍희 장군의 부관이었던 남태희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해방 직후 청도관에 입문해 이원국에게서 가라데를 배운 뒤 1947년 육군통신학교에서 당수도를 가르친 것이 계기가 돼 군과 인연을 맺고 최홍희에게 발탁된 인물입니다.

 

남태희는 준수한 외모에 행정 능력이 뛰어난 인물로 평가됩니다. ‘태권도’라는 명칭을 창조한 결정적인 인물입니다. 오도관은 사범양성 1기생인 중사 김수기(3급)와 2기생인 7사단의 하사 이응삼(4급), 이화섭(4급)을 9사단에 파견해 수련을 시키므로 전군에 태권도 보급의 첫발을 내디딥니다.

 

다음 회에서는 ‘지도관의 쌍생아 한무관’에 관해 각론합니다.

 

태권도정보연구소 / 신성환 관장

 

태권도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http://www.riti.net - 태권도정보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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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taekwondoforum.net - 태권도포럼

http://www.moodotaekwondo.com - 무도태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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