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 반세기

 

각론되는 바와 같은 엄연한 사실 때문에 견강부회(牽強附會)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태권도 역사가 재정립되어야 합니다. 태권도를 유구한 5000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 고유의 전통 무도(예)라고 주장하는 것은 정보통신(IT) 사회인 현 시점에서는 허구입니다.

 

 

총 40회에 걸쳐 '관을 중심으로 살펴본 태권도 형성사','태권도 반세기','태권도 現代史', '노병직 관장님의 친필 서한','도산체육관 김용길 관장님의 증언'을 토대(참고)로 해방과 더불어 태동돼 현재에 이른 태권도의 근대사를 재구성(편집)해 각론 합니다

최초의 인물들

곰같은 인물 윤병인 - 창무관(YMCA권법부)

 

YMCA권법부(이후 창무관으로 개칭)는 1946년 윤병인 관장에 의해 개설(창관)됩니다. 해방 후 잠시 몸을 담고 있던 조선연무관에서 떨어져 나온 윤병인 관장은 주위의 권유로 서울 종로에 위치한 기독교 청년회관(YMCA)에서 ‘권법부’를 개설하고 권법과 가라데를 가르쳤습니다.

 

순수 무인으로 정평이 나 있던 윤병인 관장은 어린 시절을 만주에서 보내면서 중국무술인 ‘주안파’를 익혔다고 전해집니다.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생활을 하면서 공수도(가라데)를 배웠습니다. 당시 일본대학에는 가라데의 달인 ‘도야마 간켄’이 있었는데, 윤병인 관장의 중국무술을 보고 한 눈에 매료됐다고 합니다.

 

그 후 윤병인과 도야마 간켄은 서로 무술을 교류하면서 우의를 다졌다고 합니다. 윤병인 관장은 무술 성취도(수련실력)가 빨라 가라데 4단에 승단이 되었고, 일본인들을 제치고 일본대학 가라데부 주장을 맡을 정도로 무술 실력이 높았다고 합니다.

 

해방 후 경성농업학교에서 체육교사로 재직하면서 무술(권법)을 가르친 윤병인 관장은 전상섭 관장과 친분이 두터워 ‘조선연무관(전상섭)’에서 수련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1946년 서울 종로 YMCA에 ‘권법부’ 후일의 창무관을 개설(창설)해 독립을 합니다.

 

창무관 3대 관장인 김순배 관장은 본인의 스승인 윤병인 관장에 관해 ‘그 분은 한마디로 정통 무인입니다. 비록 체구는 왜소했지만 혈기왕성했고 과묵한 분’이었다고 회고합니다.

 

윤병인 관장은 전상섭 관장과는 다르게 멋을 부릴 줄 몰랐던 것(?) 같습니다. 전상섭 관장은 항상 정장에 말쑥한 차림을 하고 다녔지만 윤병인 관장은 멋을 부릴 줄 몰라 항상 큼지막한 군화를 신었으며 옷은 군복을 염색해 입고 다녔다고 합니다.

 

윤병인 관장은 흰 장갑을 끼고 다녔는데 이유는 왼손의 손가락 여러 개가 없어서 항상 장갑을 끼고 다녔는데 한 여름에도 장갑을 벗지 않았다고 합니다.

 

손가락이 없는 이유에 대해서 세간에 전해지는 것은 만주에서 생활하던 시절 마적단이 휘두른 칼(장도)를 막으려고 손으로 잡아서 손가락이 잘린 것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설은 동상에 걸려 치료차 민간요법으로 전해지는 비법으로 빙초산이 좋다(치료에 효과)는 말을 듣고 빙초산에 손가락을 담가 화상을 입어 절단이 됐다는 말이 회자되는데 정확한 배경(진위)은 모르겠습니다.

 

윤병인 관장은 김순배 관장의 증언(회고)에서도 드러나듯이 무인의 성품으로 호탕하고 남을 의심하지 않고 믿는 우직한 성품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로 필자는 윤병인 관장에 대한 닉네임으로 곰 같은 무인이라고 칭합니다. 실제로 윤병인 관장이 펼치는 무술을 ‘곰 가라데’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반세기에서는 서술되고 있습니다.

 

윤병인 관장은 만주에서 생활하며 접한(수련, 섭렵한) ‘주안파 권법’과 일본 가라데의 장점을 혼합한 독특한 무술을 제자들의 특성과 체격조건에 맞게 지도했다고 합니다. 때문에 동문수학한 수련생들도 각각 신체조건과 특성에 맞는 무술을 터득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윤병인 관장이 어린 시절 배웠다는 중국권법(中國拳法) '주안파'는 어떤 무술일까라는 궁금함에 필자 나름 자료를 찾아봤는데 필자의 내공으로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중국 무술은 다양한 무술과 유파가 존재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입니다. 그래서 필자는 쿵푸의 한 종류라고 나름 이해를 할 뿐입니다.

 

정확히 어떤 기법(수련체계)이 사용되어졌고 어떤 유파인지 모르겠습니다. 황기 관장의 무술 원류에 대해서 설왕설래 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필자는 이해합니다.

 

‘YMCA권법부’는 1950년 6월 24일 '연무대회'를 개최합니다. 당시 박철희 사범은 ‘작두(도)권’ 시범을, 박기태 사범은 ‘봉권’ 시범을 각각 선보였다고 전해지는데 박철희 사범이 보인 시범은 작두가 아니라 작두와 같은 모양의 刀 (도)을 사용한 시범이 잘못 알려진 것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어떻게 시연되어졌는지에 대한 자료(영상)는 찾지 못했습니다. 연무대회에는 청도관에서 손덕성. 엄운규. 이용우 등도 찬조 시범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권법부 1기 수련생인 박철희 사범은 윤병인 관장의 수련지도법에 대해 ‘자잘한 설명 없이 몸으로 직접 보여주며 엄격하게 가르쳤다’고 회고 합니다. ‘전형적인 무도 사범으로 구령(기합) 하나도  소홀히 하는 법이 없었다고 회고합니다.

 

YMCA권법부의 수련은 방과 후 오후 4시 30분부터 했다고 합니다. 수련생은 전단지(광고)로 모집해 초기에는 5백여 명이나 됐지만 윤병인 관장의 수련(지도) 강도 너무 높아 중도 포기해 3개월이 지난 후에는 수련생이 절반으로 줄었다고 합니다.

 

당시 수련생은 이남석. 홍정표. 박철희. 박기태. 김주갑. 송석주. 이주호. 김순배 등이었습니다. 수련생 ‘맏형’격이었던 이남석 관장은 체신부에 도장을 차려서 별도로 수련생을 가르치기도 했다고 합니다.

 

당시 수련비는 태권도 반세기에 서술된 바에 의하면 1원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설탕(1포) 값이 1원이었습니다.

 

YMCA 권법부는 창설자 윤병인 관장이 납북돼 내부 갈등을 빚다가 이남석, 김순배를 중심으로 한 창무관(彰武館)과 홍정표, 박철희를 중심으로 한 강덕원(講德院)으로 분열됐습니다.

 

참고로 윤병인 관장은 1920년 5월 28일 만주 봉천(奉天, 지금의 중국 야오닝성 심양) 무순에서 사설양조장을 운영하는 집안의 둘째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태동기 기간도장 개설자와 마찬가지로 경제적으로 유복한 집안 태생이었습니다.

 

다음 회에서는 ‘갈등 및 분열의 단초가 된 각관의 세력과시와 힘겨루기’에 관해 각론합니다.

 

태권도정보연구소 / 신성환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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