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 반세기

 

각론되는 바와 같은 엄연한 사실 때문에 견강부회(牽強附會)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태권도 역사가 재정립되어야 합니다. 태권도를 유구한 5000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 고유의 전통 무도(예)라고 주장하는 것은 정보통신(IT) 사회인 현 시점에서는 허구입니다.

 

 

총 40회에 걸쳐 '관을 중심으로 살펴본 태권도 형성사','태권도 반세기','태권도 現代史', '노병직 관장님의 친필 서한','도산체육관 김용길 관장님의 증언'을 토대(참고)로 해방과 더불어 태동돼 현재에 이른 태권도의 근대사를 재구성(편집)해 각론 합니다.

 

최초의 인물들

신사 전상섭 - 지도관(조선연무관)

 

조선연무관(후일 지도관으로 개칭)은 1946년 4월 3일 ‘전상섭’ 관장에 의해 창설(창관)됩니다. 전상섭은 학창시절 유도를 배웠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척식대학에서 가라테(공수도, 空手道)를 배운 뒤 1940년에 귀국해 서울 소공동에 있던 일본 ‘강덕관 조선지부 도장’에서 지속적으로 가라테를 연마했다고 합니다.

 

강도관은 유도의 본산지입니다. 세간에는 전상섭 관장이 강도관(도장)에서 유도 유단자에게 가라데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하지만 황기 관장의 무술 본류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여러 설이 있어 정확 한 것은 알 수 없습니다.

 

해방 후 일본인들이 본국으로 돌아감에 따라 강도관 조선 지부는 주인 없는 유도도장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한국(조선) 유도인들에게 일본인들이 떠난 관계로 당시 유도를 수련한 조선인들에게 국유 재산을 대부 받거나 차지한 사람이 우선적으로 사들이거나 대부 받을 수 있는 연고권이 주어져 ‘종로구 수송동’에서 개인도장을 열고 있었던 유도 원로 이경석, 최영호, 강낙원 등이 도장을 불하받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유도회관의 전신이 된 것입니다. 경신중학교 교사였던 전상섭 관장은 이경석 관장의 허락 하에 도장 공간 일부에 공수도부 간판을 걸고 가라테 수련생을 모집했다고 합니다.

 

그때가 1946년 3월 3일입니다. 공식적으로 ‘조선연무관공수도부’ 즉, 후일의 지도관이 창관된 것입니다.

 

참고로 태동기 초기 조선연무관 공수도부를 ‘권법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종우 관장은 조선연무관공수도부가 ‘권법부’였다고 주장합니다. ‘조선연무관공수도부’ 출신으로 후일 ‘한무관’을 창설(개설)한 이교윤 관장도 당시 사용한 명칭이 ‘권법’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조선연무관공수도부 청설 초기에는 후에 중앙기독교청년회(YMCA) 권법부를 청설하는 윤병인 관장(사범)이 있었다고 박철희 사범은 증언(말)합니다.

 

이 때문에 조선연무관권법부와 중앙기독교청년회(YMCA)권법부는 ‘친척지간 혹은 형제관’ 이라고 불립니다. 초기 명칭인 조선연무관공수도부에서 조선연무관권법부로 ‘공수’라는 명칭 대신 ‘권법’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윤병인 관장의 영향(지도) 때문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합니다.

 

이종우 관장의 주장처럼 일본 용어인 가라데(당수,공수)를 사용했을 때 국민들이 갖는 감정문제도 있었겠지만 당시 청도관이나 송무관 등에서 앞서 사용하고 있는 상황을 보면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데 그렇다면 최초 수련지도를 한 지도 사범(개설자)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필자생각).

 

전상섭 관장은 보통 체격에 운동신경이 남달리 뛰어났고, 성격은 온화한 편이었다고 합니다. 전상섭은 일본 유학생으로서 평상시 정장차림을 좋아 했으며 엘리트답게 말쑥한 이미지의 신사형 이었다고 합니다.

 

‘조선연무관 공수도장’의 관번 1번은 배영기였고, 전상섭의 동생 전일섭과 김복남 등이 잇따라 입관했다고 합니다. 훗날 지도관의 적통을 이어받은 이종우 관장은 그들보다 20여일 늦게 입관했다고 합니다.

 

1949년 전임사범(지도)으로 부임한 윤쾌병 관장은 조선연무관에 큰 활력을 불어넣습니다. 윤쾌병 관장은 일본 유학시절 병리학을 전공했다고 합니다. 공부를 하면서 가라데를 배운 학구파 사범으로 당시 일본 가라데 7단으로 한국 무도계의 최고수였다고 합니다.

 

조선연무관의 기틀을 잡는 데 기여한 사람이 있었는데 ‘재일 조선인청년단장’을 지낸 ‘조영주’라는 사람으로 상당한 가라데 실력자(고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두 사람(전상섭, 조영주)이 전쟁 전까지 ‘조선연무관’의 기틀을 잡아 나갔다고 합니다. 당시 수련생은 주로 학생들(17세 전후)였고, 20~30대 전후의 직장인도 일부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연무관의 수련은 주로 청년층이 주축이 되어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중학교는 5년제로 주 수련생이 중고생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수련시간은 방과 후 오후 5시부터 3부로 이뤄졌는데 1부에 대략 100여명의 수련생이 있었다고 하니 상당히 많은 수련생이 수련을 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수련형태는 당시 개설된 5개 기간도장과 마찬가지로 주로 가라데 기술체계인 품새(형)를 위조로 수련 했다고 합니다. 대련(겨루기)은 무도를 강조하던 때라 실전적인 대련은 극히 제한(엄격하게)적으로 수련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수련생은 지도관 3대 관장을 지낸 이종우 관장을 비롯해 배영기, 홍찬길, 김복남, 김수진, 정진영, 이병로, 박영근, 이영덕 등 이었다고 합니다.

 

관번은 입관 순서만을 기준으로 삼지 않고 段(단, 수련기간)등을 고려했다고 합니다. 당시 조선무선중학교에 다니다가 조선연무관에 입관한 이교윤 관장은 선, 후배간의 위계질서가 철저했던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 합니다.

 

당시에는 ‘스승과 제자, 선배와 후 배간’의 “예의를 무척 중시”했다고 합니다. 때문에 선배 앞에서는 담배를 피울 수 없었고 수련 후 샤워를 할 때도 입관 순서대로 씻었다고 합니다. 특히 신규 수련생은 초단(1단)에 승단 할 때까지 도장 청소를 도맡아 했다고 합니다.

 

조선연무관은 서울에서 태동했지만 단계적이고 체계적인 발전은 전북 전주를 중심으로 한 지관(支館)에서 이뤄졌습니다. 연무관의 첫 지관은 1947년 5월 17일 전일섭이 개관한 지도관 군산체육관이었습니다.

 

전일섭은 5개 기간도장 중 지도관의 지관 진출이 가장 빨랐다고 증언합니다. 지도관은 전주, 군산, 이리를 본거지로 김제, 정읍, 남원 등 전라북도 전 지역으로 세력을 넓혀갔다고 증언(전해)됩니다.

 

초창기(조선연무관당수도부)에는 YMCA 권법부 창설자인 윤병인 관장을 비롯해 창무관 관장을 지낸 이남석 관장도 연무관에서 수련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굳이 따지자면 창무관은 지도관에서 분가한 형제관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전상섭 관장은 6.25때 납북되어 이후 태권도계에서 보이지 않습니다.

 

지도관은 1대 관장 윤쾌병, 2대~4대 이종우, 3대 배영기, 5대 이승완으로 적통이 이어져왔습니다.

 

다음 회에서는 ‘형보다 더 큰 동생 - 전일섭’에 관해 각론합니다

 

태권도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http://www.riti.net - 태권도정보연구소
http://www.ctu.ne.kr - 태권도지도자교육

http://www.taekwondoforum.net - 태권도포럼

http://www.moodotaekwondo.com - 무도태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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