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 반세기

 

각론되는 바와 같은 엄연한 사실 때문에 견강부회(牽強附會)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태권도 역사가 재정립되어야 합니다. 태권도를 유구한 5000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 고유의 전통 무도(예)라고 주장하는 것은 정보통신(IT) 사회인 현 시점에서는 허구입니다.

 

 

총 40회에 걸쳐 '태권도 반세기', '태권도 現代史', '노병직 관장님의 친필 서한', 도산체육관 김용길 관장님  의 증언을 바탕(참고)으로 해방과 더불어 태동돼 현재에 이른 태권도의 근대사를 재구성(편집)해 각론 합니다.

 

최초의 인물들

 

고집불통 황기 - 무덕관

 

무덕관을 세운 황기(黃埼) 관장은 태권도 창시자들 중 유일하게 가라데 출신(수련)이 아니었습니다. 황기 관장은 가라데가 아닌 중국무술을 수련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여러 정황으로 보면 가라데를 완전히 배제(외면)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됩니다. 황기 관장이 가끔씩 일본어로 된 가라데 책을 보며 형(가라데)을 연마(수련)하는 모습을 목격하곤 했다고 합니다.

 

도산 체육관(송무관) 김용길 관장은 황기관장이 만주권법을 수련했다고 하는 것은 세간에서 하는 말이지 실제로 족보(계열)를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런 정황으로 중국무술(권법)과 관련이 있다면 수련한 내용(품새,형)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이유로 들며 예로 창무관에서도 권법을 수련했다고 하며 창무관 만의 독자적인 권법에 기초한 형(품새)이 존재한다는 것을 예로 듭니다.  

 

도산 체육관 김용길 관장의 말과 제자들의 말을 토대로 유추하면 세간에 알려진 만주 권법을 배웠(수련)다는 것은 정확하지가 않은 것 같습니다.

 

중국무술이었든 가라데였든, 아니면 두 무술의 혼합 이었든 간에 해방직후 현대적 의미의 태권도를 개척하는데 기여한 황기 관장은 50~60년 태권도 변천과정에서 독자적으로 활동해 태권도 통합과정에서 여러 가지 갈등과 마찰을 빚은 것은 분명합니다.

 

좋게 표현하면 시류에 부하뇌동하지 않고 자신의 독자적인 무술을 고집했다 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을 위한 미래(?)를 위한 아집만을 내세웠지 당시의 대의명분(大義名分)이었던 태권도 통합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할 수(평가)있습니다. 여하튼 황기 관장은 엄청 고집이 셌던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황기 관장은 1960년대 중반까지 무덕관 중앙도장에 대한수박도회 간판을 내걸 정도로 ‘수박도’에 심취해 결국 1965년 제자들에 의해 무덕관에서 제명 당하는 ‘수모’를 겪습니다. 그의 젊었을 적 무술관련(수련) 이야기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1914년 경기도 장단 출생인 그는 경기상고를 나와 1935년 남만주 철도국에 입사했다는 이력 정도가 알려져 있을 뿐입니다. 이때 만주에서 우연히 중국 무술의 고수 중 한 사람인 양국진을 만났고 그에게서 중국무술을 배웠다고 만 전해집니다.

 

중국 무술은 계열이 엄청 많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너무 많다보니 계보가 확연히 드러나지 않기에 아마도 황기 관장이 수련했다는 무술 종류가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는 것은 그런 이유가 아닐까 하며 황기 관장이 접한 무술이 쿵푸 계열의 한 무술이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해 봅니다.

 

황기관장은 해방이 된 후 조선철도국에서 일을 했고 도장(체육관)을 용산 철도국 부근에 개설했기 때문에 세간에서는 황기 관장을 ‘철도국장’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황기 관장이 해방 직후 서울 용산역 부근의 철도국에 개설한 도장은 ‘운수부 당수도부’로 자신의 뿌리로 내세운 만주 권법과는 전혀 다른 명칭으로 시작(출발)을 했습니다. 이것이 나중에 무덕관으로 발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덕관 창설 연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청도관과 조선연무관 이후에 창설됐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이종우 관장은 “무덕관은 분명히 청도관이나 조선연무관보다 먼저 창설되지는 않았다”고 하며 “윤병인 관장이 창설한 YMCA 권법부와 비슷한 시기에 창설됐을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도산체육관 김용길 관장에 따르면 송무관 1944. 03, 청도관 1944. 09, 무덕관 1945. 10, 조선연무관 1946. 03, YMCA 권법부 1946. 10 에 개관(창관) 된 것이라고 주장(증언)합니다.

 

황기 관장은 선비형의 모습에 목소리가 크지 않은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였다고 합니다. 카리스마가 돋보이는 청도관 이원국 관장이나 ‘세련된 신사형’이었던 조선연무관 전상섭 관장과는 여러모로 달랐던 것 같습니다.

 

이원국 관장이나 전상섭 관장과 다른 점은 대체로 해방 직후 현대적 의미의 태권도장을 개설(개관)한 사람들이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중 가라데(공수도)를 익힌 것과는 달리 황기 관장은 만주에서 중국무술을 익혔다는 것이 세간에 알려진 사실인데 김용길 관장의 주장(증언)에 의하면 철도국 경리과에서 직원으로 근무하던 현종명(청도관)이란 분이 있었다고 합니다.

 

현종명 그분이 초창기 무덕관에서 품새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현종명 그분은 청도관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 상황을 종합해 보면 초창기 무덕관(황기)에서 구사한 동작들이 가라데 동작인 것을 감안하면 어떤 상황이었는지가 유추됩니다.

 

그러나 황기 관장과 관련하여 주장되는 무력(武歷)을 반증할만한 자료(사료)는 찾을 수 없다는 것이 태권도 원로들의 견해입니다. 1955년 서울시 중구 동자동 서울역 부근에 무덕관 중앙본관을 신설한 황기 관장은 관번 1번인 김운창을 비롯해 최희석, 유화영, 남삼현, 김인석, 이복성, 황진태, 원용법, 정창영, 이강익, 홍종수 등 걸출한 제자들을 배출했습니다.

 

제자들 대부분은 철도국 직원이었는데 홍종수와 지상섭은 대구를 중심으로 한 경북지역에, 전쟁 중에 부산에 내려간 김인석은 경남지역에, 남삼현 임명순은 대전 및 충남북 지역에, 오용균은 전북지역에, 박용화는 인천에, 김창진은 전남에, 박영진은 강원도에 세력을 넓혔습니다.

 

전국에 9개의 지관(支館)을 신설한 뒤에는 “한.중(韓.中) 친선 국제 당수도 연무대회”를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서울로 돌아온 김인석은 경기도 시흥 안양지역에 도장을 개설 해 이응식, 노우종 등 제자들을 배출 했습니다.

 

홍종표 관장은 무덕관의 특성에 관해 “무덕관은 철도국(운수부)을 통해 각 지방의 기차역 창고에 도장을 개관하면서 세력을 넓혀 무덕관하면 철도역이 떠오른다 ”고 회상합니다. 교통 중심지에 도장을 개관하다 보니 수련생 중에는 자연스럽게 지역에서 한가락 하는 한량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황기 관장은 1956년에 <무예도보통지>를 접하고 한국 전통무도(예)인 수박희에 심취합니다. 수박희에 심취한 것이 황기 관장의 행보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황기 관장은 당시 2년에 걸쳐<무예도보통지>를 꼼꼼하게 필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무예도보통지에 기술된 대로 수련하면서 ‘당수도’란 이름을 ‘수박도’로 바꿉니다.

 

이렇게 해서 대한수박도회(大韓手博道會)가 탄생됩니다. 황기 관장은 그 후 독자적인 행보를 합니다. 50년 부산 피난시절 노병직, 윤쾌병, 현종명, 이종우 등과 함께 대한공수도협회를 출범시키지만 자신(황기)에 대한 대우(처우) 문제로 대한공수도협회를 탈퇴하고 “대한수박도회”를 창설하고 세력 확장에 전념합니다.

 

이때부터 황기 관장은 태권도인들로부터 ‘문제 인물’로 인식됩니다. 소위 ‘왕따(따돌림)'을 당한 것입니다.

 

 다음 회차에서는 고뇌하는 무덕관 - 김인석에 관해 각론합니다.

 

태권도정보연구소 / 청호태권도장 / 신성환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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