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 반세기

 

각론되는 바와 같은 엄연한 사실 때문에 견강부회(牽強附會)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태권도 역사가 재정립되어야 합니다. 태권도를 유구한 5000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 고유의 전통 무도(예)라고 주장하는 것은 정보통신(IT) 사회인 현 시점에서는 허구입니다.

 

필자의 이 주장은 노병직 관장님이 보내온 친필서한에서도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지난날 발전이라는 명분만 내세워 앞만 보고 달려 왔다면 이제는 내실을 다질 때입니다. 모방도 창조입니다. 해방과 더불어 가라테를 모체로 근대 무술로 시작된 태권도가 스포츠라는 성격으로 세계화된 것 그 자체로 태권도는 우리의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일본 무술인 가라테를 모체로 시작된 무술이지만 민족의식 자각에 의해 우리의 정서(혼)가 내재된 무도(예)로 정립돼 발전한 대한민국의 국기며, 전통이며 정통 무도로 수련되어지는 세계화된 무도(태권도)입니다.

 

총 40회에 걸쳐 '태권도 반세기', '태권도 現代史', '노병직 관장님의 친필 서한'을 바탕(참고)으로 해방과 더불어 태동돼 현재에 이른 태권도의 근대사를 재구성(편집)해 각론 합니다.

 

 

최초의 인물들

 

시조(始祖) 이원국 -그리고 청도관(靑濤館)

 

현대적 의미의 태권도장은 해방 직후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최초의 도장인 청도관이 1944년 9월, 이원국(李元國․당시 35세)에 의해 서울 서대문고 옥천동에서 시작됐다고 하지만 정식으로 간판을 내걸고 후진을 양성한 시기는 1946년 2월 27일부터라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태권도장 청도관(靑濤館)을 최초로 개관하여 현대적 의미의 태권도를 전파한 인물이 이원국(李元國)관장입니다. 이원국은 1907년 충북 영동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는 광산을 경영했던 부모 덕분에 영동소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 중․고교를 거쳐 19살(1926년)에 중앙대 법과에 입학했습니다. 하지만 공부보다는 운동에 관심이 더 많았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권투를 배우고 싶어서 중앙대 권투부에 들어가서 2주간 기본기 연습을 하고 일본 학생과 처음으로 스파링을 했는데 코뼈가 부러지는 불상사가 발생했고 치료를 받으며 생각을 바꿨다고 합니다.

 

복싱은 호신술로는 적당하지만 배우는 과정에서 잦은(치명적)부상으로 인해 적절한 운동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중도에 포기하고 자신을 보호(호신)할 수 있는 다른 대안적 무술(운동)을 배우고자 했는데 그 과정에서 선택한 것이 공수도(가리데)라는 것입니다.

 

일본 유학시절 조센징(식민지) 출신의 유학생으로서 자신의 안전을 지키는 방법을 강구해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가라테 수련 모습을 보게 되는데 수련생들의 절제된 자세와 힘찬 기합, 손, 발 동작에 매료돼 가라테를 배우기로 했다고 합니다.

 

이원국이 택한 가라테 도장은 일본 공수도의 본관인 송도관(松濤館)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이원국은 공수도의 시조로 일컬어지고 있는 후나고시 선생으로부터 5년 동안 수련을 받아 4단을 부여받았다고 합니다.

 

1944년 귀국해 조선총독부 법무관으로 근무하던 그는 이듬해 해방이 되자 치안대를 결성해 치안대장 역을 맡았습니다. 당시 서울에는 사설 치안대가 2개 있었는데, 하나는 ‘몽양 여운형’ 선생이 결성한 “건국준비위원회” 산하의 치안대였고, 다른 하나는 이원국이 결성한 치안대였습니다.

 

 이원국이 결성한 치안대는 서울 관수교 다리 부근 호광학원에 있었다고 합니다. 미군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사설 치안대는 해산이 되어 해체가 되었습니다.

 

이원국은 1946년 2월(27일) 서울 시천교당(侍天絞堂) 자리에 ‘당수도 청도관’ 간판을 내걸고 본격적으로 가라테 보급에 나섰습니다. 청도관의 ‘도(濤)’는 자신이 무술을 익힌 일본 공수도(가라테) 송도관의 ‘도(濤)를 차용 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젊은 청년의 꿈과 기개가 파도처럼 퍼져 나가라는 뜻에서 청도관(靑濤館)이라 명명한 것으로 필자는 생각합니다. 청도관의 ‘濤(물결도)’는 道(길도)가 아닌 큰 물결의 의미로 자신이 무술(가라테)을 익힌 송도관의 ‘도(濤)를 차용한 것으로 젊은 청년의 꿈과 기개가 파도처럼 퍼져 나가라는 뜻을 담고자 청도관(靑濤館)이라 명명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원국 관장은 철도경찰학교에서 당수도(가라테)를 가르쳤습니다. 태권도는 후에 최홍희(남태희 부관)장군에 의해에 명명되지만 이원국 관장이 청도관을 개관하여 가라테를 수련시킨 것이 현대적 의미에서 태권도의 시작인 것입니다. 일제시절 많은 조선(한국) 유학생들이 가라테를 배웠(수련)습니다.

 

당시 가라데 달인은 해방 후 좌익 빨치산으로 유명한 남도부(하준수 https://blog.naver.com/philatelia/222690345635)

라는 사람으로 당대 최고의 가라테 달인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가라데를 국내에 보급(전파)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상업적으로 태권도(가라데) 보급에 나선 이원국을 태권도의 시조라 불러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원국 관장의 제자로는 엄운규를 비롯해 손덕성, 현종명, 이용우, 백준기, 최규식, 유응준 등이 있습니다.

 

그 후로 우종림, 이상훈, 박해만, 이준구, 김봉식 등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준구는 13세 때부터 이원국에게 당수도를 배워 이원국 관장이 아끼는 제자 중의 한명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시천교당을 수련장으로 사용했던 청도관 수련생들은 예배시간을 피해 오후 5시부터 밤늦게까지 수련을 했다고 합니다. 엄운규는 당수도에 대한 열정이 대단해 예배당 마루바닥에서 자면서 수련을 했다고 합니다.

 

이원국 관장은 눈이 매섭고 매사에 빈틈이 없는 깐깐한 사람으로 단단한 몸집에 눈빛은 날카로웠고, 표정은 강직했다고 합니다. 강력한 카리스마로 관원들을 인솔한 이원국 관장은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도장에 들러 수련하는 모습을 지켜봤다고 합니다.

 

이런 이원국 관장을 제자들은 관장을 대하기 어려워 마주치기를 꺼려했다고 합니다. 안국동으로 청도관을 옮긴 이원국은 당수도 연무대회(鍊武大會)를 개최했습니다. 명동의 시공관(지금의 대한투자금융 건물)에서 열린 이 연무대회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무술대회로 일컬어집니다.

 

 

당시의 연무대회는 승패를 가르는 대회보다는 수련의 정도(程度)를 선보이는 자리였습니다. 연무시범은 당수도 기술체계를 바탕으로 형(型)과 권법이 주류를 이뤘습니다. 청도관은 이원국 관장이 사회활동을 했기 때문에 수련지도는 주로 유응준과 손덕성이 맡았다고 합니다.

 

‘푸른 파도’를 의미하며 청년 기상과 활동을 상징으로 삼았던 청도관은 그 당시 송무관(노병직)과 가장 사이가 좋아 서로 연무시범을 갖기도 했습니다. 1946년 노병직이 고향인 개성에 정식으로 송무관(松武館) 간판을 내걸자 이원국은 손덕성, 엄운규 등 제자들을 이끌고 개성에 가 연무시범을 보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청도관은 5대 기간도장 중 조직이 가장 컸습니다. 1950년 무렵 청도관 관원은 2백명 안팎이었다고 합니다.

 

노병직 관장은 초창기 국내 태권도계(무술)에서 활동을 한 사람은 자신 외에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유는 6.25 전쟁 때 전상섭, 윤병인은 행방불명이 되었고 이원국은 일본으로 간 후 국내 태권도계에서 활동한바 없고 황기, 윤병인은 어렵게 만든 현 대한태권도협회에 동참을 거부하고 이탈하여 독자활동을 해왔기 때문이라고 친필서한에서 주장합니다.

 

노병직 관장 자신마저도 협회를 이탈했다면 아무리 군정 시대지만 유사단체 통합과 대한체육회 가입은 없었을 것이라고 호언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1945년 8.15 광복이후 태권도의 태동과 관련하여 이경명 지음 “한국전통무예의 철학 태권도” 에서 ‘송덕기(1893~1987)를 주축으로 한 무예인의 활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하고’ 라는 것은 ‘사실과 전혀 다르며 거짓이다’고 노병직 관장은 주장합니다.

 

송덕기는 태권도(공수도 당수도 권법) 초창기는 물론 태권도 발전에도 전혀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당시 주축이 되었던 인물은 이원국(청도관 관장겸사범), 노병직(송무관 관장겸사범), 전상섭( 유도조선연무관 권법부초대사범), 윤병인(YMCA 권법부 대사범) 외에는 없다는 (아니다)것으로 당시 이 4인방이 해방이후 태권도라는 무술(도) 태동에 있어 주축이라고 노병직 관장은 주장합니다.

 

다음 각론에서는 “고집불통 황기 - 무덕관”에 관해 각론합니다

 

태권도정보연구소 / 청호태권도장 / 신성환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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