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Tube 영상 보기는 아래 유투브 영상 보기를 클릭하세요

 

虛實篇(허실편) 31강 “승리는 반복되지 않는다”

신성환

 

여러분과 같이 손자병법을 토파(공부)하고 있는 “신성환 관장”입니다. 지금 우리는 손자병법 虛實篇(허실편)을 토파(공부)하고 있습니다. 총 43강 중 31번째 강의입니다.

 

손자병법 13편중 6편째 편을 토파(공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손자병법을 크게 둘로 나누면 상편과 하편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나눈 것은 필자의 개인적인 구분입니다. 1편 ‘시계편’부터 시작해서 오늘 각론하고 있는 6편 ‘虛實篇(허실편)’까지가 ‘상편’이고 그다음에 7편 ‘軍爭篇(군쟁편)’부터가 ‘하편’입니다.

 

그러니까 ‘허실편’이 손자병법 13편중 여섯 번째 편으로 앞에서 말씀드렸지만 손자병법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시각으로 볼 때 가장 멋있는 편입니다. 손자병법 전체 중에서 한 편만 좀 들어 보라고 했을 때 이 ‘허실편’을 들어보라고 할 것입니다.

 

손자병법에서 강조 하는 승리를 위한 손자의 생각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편이 바로 이 여섯 번째 ‘虛實篇(허실편)’입니다. ‘허실편’을 보면 멋있는 말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오늘의 각론 주제도 그 멋있는 말(내용)중의 한 구절입니다.

 

얼마나 멋있는지 한번 토파해 보겠습니다. 손자병법 중에 우리는 가장 익숙하고 멋있는 말로 ‘지피지기’란 말을 가장 많이 인용(기억)합니다. ‘지피지기’ 참 멋진 말입니다. 전쟁을 하기 전에 미리 상대와 나를 비교(분석)해서 미흡한 것을 보강해서 전쟁에 임하면 승리 할 수 있다고 하는 ‘지피지기’ 참 멋있는 말(주장)입니다.

 

‘故其戰勝不復(고기전승부복)’ 보편적으로 ‘전승불복’이라고 하는 이 말도 정말 멋있고 중요한 말입니다. 전승과 관련하여 손자가 주장하는 ‘전승불복’이라 것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불복’ 반복되지 않는다. 전쟁에서 승리는 반복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이 문장을 두고 많은 학자들이 고민을 많이들 합니다. ‘復(복)’자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하는 고민을 많이들 합니다.

 

‘復(복)’자에 대해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렇게들 해석합니다.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 나가서 승리를 했습니다. 승리를 했는데 그 승리를 한 방법이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즉 이번에는 불로 공격해서 이겼습니다.

 

그런데 다음에 또 전쟁을 하는데 이번에도 불로 공격하면, 즉 똑같은 방법으로 공격하면 승리를 할 수 없다. 이런 뜻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 있잖습니까? 이번에 주식을 해서 돈을 벌었습니다.

 

그래서 그 주식에 투자를 또 했습니다. 그러면 이번에도 돈을 또 벌수 있을까요? 물론 벌수도 있지만 똑같은 방법으로 승리를 다시 얻는다는 것은 참 힘들다고 해석하는 방법이 있고, 또 다른 해석은 군대(전쟁)에서 승리는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오늘 승리했다. 그래서 내일도 승리하리라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일을 성공(쟁취)해 보신 적 있잖습니까? 그 성공한 일이 영원히 나에게 계속되리라고 생각하세요?

 

어느 날 하루아침에 그 성공이 완벽한 실패로 바뀌는 것 많이 봤잖습니까? ‘전승불복’ 필자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승리’라고 하는 것은 결코 나에게 또다시 반복해서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승리한다는 것, 결국은 무엇입니까? 내가 지금 승리했다. 그 승리가 영원한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 승리 뒤에는 또 뭐가 기다리고 있어요? 나를 먹을 승리하는 또 다른 사람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승리라고 하는 것은 영원히 나만이 간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필자는 그런 의미에서 허실편의 ‘전승불복’이라고 하는 이 문장(구절)이 손자 철학(사고)에서 보면 참으로 대단한 멋진 말 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말들 때문에 우리가 손자병법을 토파(공부)하는 것입니다. 손자는 ‘승리’ 승리하라고 그렇게 강조 하면서 백번 싸워서 백번 이기라고 하지를 않습니다. 결국 승리라고 하는 것은 돌고 도는 것이다. 라고 합니다.

 

내가 오늘 승리했으면 내일은 패배할 수도 있고, 또 패배했으면 다시 승리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손자병법(손자)의 철학(사유)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승불복’에 대해서 여러분과 같이 토파해 보겠습니다.

 

승리는 결코 두 번, 세 번 나에게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손자는 ‘전승불복’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이런 말을 합니다. 군대에서 전쟁을 치르는 리더(장군)는 엄청난 고독감에 쌓여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 지도자가 갖는 고독감 아세요? 음~ 가정에서 어머니가 갖는 고독감을 느껴(헤아려)보시나요? 매일 자녀들에게 도시락 싸서 학교에 보내는데 누구도 매일 반복하는 일에서 오는 고독감을 알아주지 않습니다.

 

당연히 해주는 것으로 압니다. 그렇지만 혼자서 느끼는 어머니의 자녀(가족)를 뒷바라지 하는 고독감을 손자는 말하는 것입니다. 지도자는 어떻다고 해요? 고독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因形而措勝於衆(인형이조승어중)’ 이란 말을 합니다. 부대 조직의 리더는 인형이 조승하다고 합니다. ‘인형이조승어중’이란 말은 서로 부딪혔을 때 상대방의 형세(모습)가 있고 내가 처한 형세가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 형세를 잘 이용하란 것인데 ‘措(조)’라고 하는 것은 ‘不(불)’자와 같은 의미입니다. ‘因形而措勝於衆(인형이조승어중)’ 즉 승리를 상대로부터 이뤄냅니다.

 

위 말에서 ‘衆(중)’이라고 하는 것은 요즘 말로 하면 병사들을 의미합니다. 부대 구성원 중에 소총수들을 의미합니다. 무슨 말이냐면 전쟁에서 장군이 승리를 합니다. 어떻게 승리를 해요? 형세를 잘 살펴서, 상대(적군)의 형세(군세)가 어떤지 우리 부대의 형세가 어떤지 그것에 기초해 승리를 이뤄냅니다.

 

승리를 병사들에게 턱 안겨줍니다. 그런데 병사들이 알아요? 몰라요? 불능지입니다. 자기들이 잘 싸워서 승리 한 줄 압니다. 물론 병사들이 고생을 해서 싸워서 이겼습니다.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손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장군이 상대방과 나의 형세를 잘 분석해서 승리를 이뤄 병사들 앞에 턱 던져준단 말입니다. 그럼 병사들은 그 승리를 자신들이 잘 싸워서 이겼다는 것만 알지, 그 승리가 이뤄지기까지 장군이 얼마나 고생(고민)을 했는지는 모른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군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형세를 판단을 하고, 전쟁과 관련한 여러 변수들을 고려해 승리를 하기 위한 전략과 전술을 구사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고민(어려움)이 있었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런 고민을 하는 과정에 있어서 혼자 외로워요 안 외로워요? 그 외롭게 고민하는 상황을 다 일일이 말해 줄 수 있어요 없어요? 말해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갖고 있는 마음을 자식들한테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이유가 이렇다고 하는 것을 다 말해 줄 수 있습니까? 말해 줄 것이 있고 못해 줄 것이 있는 것입니다. 안 해주는 것이 아니라 설명(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집안에서 리더니까요. 승리하는 장군의 고독한 고독감을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人皆知我所以勝之形(인개지아소이승지형)’이라고 합니다. 앞문장하고 잘 연결시켜야 이해가 됩니다.

 

‘因形而措勝於衆(인형이조승어중)’에서 ‘衆(중)’이란 말이 나왔습니다. 그 다음에 지금 각론하려고 하는 ‘人皆知我所以勝之形(인개지아소이승지형)’에서 ‘人(인)’이 나옵니다. 앞에서 언급한 衆과 지금 각론 하는 人은 계급을 말하는 것입니다.

 

‘衆’은 요즘 말하면 일반 소총수 병사들이고, ‘人’은 장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약간의 계급적인 차별이 있습니다. 장교들 모두는 다 알아요. 뭘 아냐 하면 ‘勝之形(승지형)’ 내가 지금 승리를 만든 그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를 안다는 것입니다.

 

지금 승리한 그 모습이 이런 모습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而莫知吾所以制勝之形(이막지오소이제승지형)’ 굉장히 어려운 말입니다. 이말 쉬운 말이 아닙니다. ‘勝之形’은 아는데 ‘制勝之形(재승지형)’은 모른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승리 모습은 아는데 승리 모습이 있기까지 어떻게 승리가 만들어졌는지 깊은 속(상황)은 모르는 것입니다.

 

아! 이 문장 설명하기가 엄청 힘듭니다. ‘勝之形(승지형)’과 ‘制勝之形(재승지형)’, 이 두 가지 상황을 묶어서 한 번에 말을 하고 있는데 부연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굉장히 미묘한 한문 해석입니다.

 

승리를 했는데 일반 병사들은 어떻게 승리를 했는지 몰라요. 다 자기들이 잘해서 승리를 이룬 것으로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 소총수 병사들 보다 조금 계급이 높은 장교 급 간부들은 우리가 승리한 모습이 이런 모습이라는 것은 아는데, 그 승리를 어떻게 만들어 냈는지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지도자는 외롭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정작 승리를 이끈 장군(리더)은 그 승리가 어떻게 이뤄진 것인지 설명을 못 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둔 승리가 이렇게 해서, 내가 이렇게 했지 라고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 요즘말로 에이 그거 나도 그렇게 하겠다고 다들 그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승리를 했기 때문에 그리 말할 수 있는 것이지 아직 승리를 하지 못한, 서로가 뒤엉켜 전투를 하는 상황에서는 승리할지 안할지 모르는 상황인 것입니다.

 

승리한 상황(모습) ‘勝之形(승지형)’은 알아도 승리를 어떻게 이끌어 냈는지 ‘制勝之形(재승지형)’은 모르는 것이고, 그 승리한 형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이란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승리한 모습에 대해서 설명하기도 힘들고 설명해봤자 구차한 것입니다. 맡 며느리가 가족이 모두 모이는 명절에 내가 이 명절을 치르기 위해서 음식을 만들고 하는 등 고생한 상황을 다 말 못해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맡 며느리만이 갖는 그 뭐랄까 말 못하는 고독감이 있는 것입니다. 장남만이 갖는 집안에서의 리더로서 고독감이 있단 말입니다. 어떻게 그 말 못하는 고독감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느냐하면요 필자가 장남이기 때문입니다. ㅎ

 

막내 동생들은 모르는 뭐랄까 집안의 가장(리더)으로서 갖는 그 집안을 이끌어 가기 위해서 갖는 스스로 느끼는 거시기한 말 못하는 고독감이 있는 것입니다.

 

특히 요즘 아버지들 집안에서 열심히 돈 벌어 오는데 집안에서 별로 힘을 쓰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뭐 사달라고 조르죠. 부인은 돈 안 갖다 준다고 바가지 긁죠. 누가 알아요. 아버지로서 돈을 벌기 위해서 밖에서 얼마나 고생하는지 모른단 말입니다.

 

얼마나 힘들게 돈을 버는지 말해 줄 수도 없고 난감합니다. 요즈음 집에서 돈 벌어오는 가장들이 집에 들어오면 다들 갈 데가 없습니다. 집에 들어오면 옛날처럼 큰소리치며 쉴 곳이 없습니다.

 

안방은 부인이 차지하고 있고 거실에 가면 TV 채널은 아이들이 붙들고 있고 컴퓨터도 그렇고 가장으로서 돈 벌어오는 아버지들은 마땅히 쉴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주로 어디로 가요? 베란다로 갑니다.

 

저녁 시간대에 아파트 베란다를 보면 여기 저기 불빛이 반짝반짝 거립니다. 담배들 피느라! 그런데 그 유일한 쉴 공간인 집안 베란다에서도 편하게 담배를 피우지 못합니다. ㅎ

 

잠시 논조가 다른 곳으로 흘렀습니다. 손자가 고민하는 문제가 그것입니다. 장군(지도자)이 승리를 병사들에게 안겨주고 또 그 승리를 어떻게 만들어냈는지 승리에 대해 일일이 설명할 수 없는 고독감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장군이 되려면, 사회 조직의 리더가 되려면, 정말 집안의 어른이 되려면, 뭐예요? 고독함을 감수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고생하는 줄 알아, 이 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상황을 말하는 순간 위대하게 이른 승리(업적)가 반은 빛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공이 깎여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말 안 해도 알아요? 몰라요? 당장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은 어떻게 집안을 이끌어왔고, 정말 이 사회를 누가 끌고 갖는지 안단 말입니다.

 

회사를 끌어가는데 누가 고생을 했는지 안단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리더는 고독함을 묵묵히 견뎌내야 한다는 것이고 리더가 느끼는 고독함은 리더로서 권한이자 의무이자 책임감인 것입니다.

 

최고라는 것이 밖으로 들어나는 화려함만이 아니라 그 화려함에 걸맞게 고독함이 같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고는 항상 고독한 것입니다. 최고의 리더는 조직을 끌고 나가기 위해서 감수해야하는 것들을 시시콜콜하게 다 말할 수 없고 묵묵히 감수하며 조직을 이끌고 나가야 한다는 것을 손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공자도 이런 말을 합니다. 필자가 손자병법을 토파(각론) 하면서 논어에 나오는 사상을 종종  연결시키는데 논어에 "中人以上(중인이상)可以語上也(가이어상야), 中人以下(중인이하)不可以語上也(불가이어상)"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중인수준 이상에 도달한 사람에게는 수준 높은 이야기를 해줘도 좋지만 중인 수준 이하인 사람에게는 수준 높은 이야기를 해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중인이라고 하는 것은 신분을 말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 레벨에 있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으로 그 정도(중인 이상)는 되어야 ‘가이’ 즉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할 수 있냐면 상위에 있는 어떤 상황 즉 높은 뜻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최소한 중인 이상이 되어야 말을 해 줄 수 있고 그 말을 이해(받아들일 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설명하기 힘든 것들이 있잖습니까? 거 왜? 추상적인 이야기, 어떤 일에 있어서 원리적인 측면의 이야기 그런 것들을 이해 할 수 있는 수준의 사람들은 중간 정도 사람(신분) 이 돼야 그런 원리적인 이야기를 해줄 수 있지, 중간도 안 되는 사람은 이야기를 해 줘도 알아듣지를 못 한다 이해를 못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 대해 그런 상황이 일어난(벌어진) 원인과 원리에 대해서 말을 해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공자가 꼭 그런 뜻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섯 살짜리 어린아이에게 ‘인생이란 것이 뭔지 아니? 라고 인생에 대해서 말을 해 줄 수 있어요.

 

그래도 여러분 정도가 되니까 제가 손자병법을 같이 이야기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결국은 사람마다 느끼는 수준이 있단 말입니다. 정도에 따라서 말의 수준(의미)이 달라지고 말을 함에 있어 구사하는 어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각론 주제인 ‘전승불복’은 군대에서 승리는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 아니다. 그 승리를 이루기까지 지도자는 엄청난 고독감을 갖고 있다. 그 승리를 만든 형상은 밑에 있는 사람이 알아주긴 하지만 어떻게 그 승리를 이끌어냈는지 그 상황을 이끌어내기까지 리더(장군)가 갖는 고독감과 시련(고생)을 부대원(조직) 그 누구에게도 말해 해줄 수 없다는 것이라고 말을 하면서 지도자가 리더십을 발휘하는 과정에서의 외로움에 대해서 말을 합니다.

 

손자는 그 과정을 말하면서 이런 말을 부연합니다. 그러므로 라고 하면서 말을 이어가는데 그러므로 라는 것은 ‘인과관계’가 아니라 그냥 그러니까 그래서 라는 의미입니다. 전쟁에서 승리는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을 합니다.

 

이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승리라고 하는 것은 지금 내가 이룬 성공이 영원히 지속되리라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룬 성공이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바라는)하는 것 자체가 사실 착각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어떤 것을 이룬다는 것은 끊임없이 순환하고 반복하는 것입니다.

 

명심보감에 ‘복’이라고 하는 것,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불가한 것이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나에게 지금 행복이 다가왔습니다. 행운이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그 행운이라고 하는 것이 또다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나에게 지금 행운이 다가왔습니다. 그 행운이 내일도 또 오는 것이 아닌 것 입니다. 왜요? 시간이 틀리고 공간이 틀리고 상황이 틀리기 때문입니다. 상황이란 것은 어떻게 돼요? 끊임없이 변한단 말입니다.

 

봄이 영원히 지속되질 않잖습니까? 여름, 가을, 겨울, 또다시 봄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공간과 시간과 우주는 변화고 있잖습니까? 이와 같이 나도 항상 승자의 입장에 설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취한 승리가 영원히 지속되는 것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내가 하나를 얻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하나를 잃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입니다. 지금 ‘허실편’에서 손자가 주장하는 것은 다른 곳에서 주장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뭐랄까요 멋있습니다.

 

사실 삶에 있어서 이런 말이 멋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이야기가 멋있습니다. 이기려면 어떻게 한다고 하는 것 보다는 아! 승리란 영원히 반복되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 성공에 도취되지 말지니라. 뭐 이런 말이 멋있잖습니까?

 

‘허실편’에는 굉장히 철학적인 거시기한 원론적인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옛 부터 이런 말을 합니다. 安不忘危(안불망위)! 편안할 때에도 위태로움을 잊지 않고 스스로 경계해야 하며 절대로 편안할 때 위태로움을 잊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은 뭘 잊어버리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내가 지금 편안하다고 앞으로 다가올 위험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항상 편안할 때 내게 다가올 위기를 생각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몇 가지 더 부연합니다. ‘관행사곡실시회(官行私曲失時悔)’란 말이 있습니다. 내 지위를 남용하여 사사로이 사용한다면 그 자리에서 물러나는 순간 후회할 것이다. 지위의 남용은 결국 파국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국가 공직기관에서 관직에 있을 때 직분을 이용하여 나와 친인척들에게 사사로이 일을 처리하여 유리하게 하면, 동창생들한테 이익이 가도록 결정을 하면 결국은 어떻게 됩니까? 자기 관직을 이용해서 사사롭게 관직의 지위를 남발하면 어떨 때 후회해요? 관직을 잃어버렸을 때 나중에 퇴임을 하고 자연인으로 돌아왔을 때 후회한단 말입니다.

 

권세(지위)가 있을 땐 아무 말 안 하지만 권세가 떨어지면 어떻게 해요? 당장 줄줄이 감자 캐듯이 과거의 불합리한 행적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성공했다. 그래서 내가 권세가 있다. 내가 지금 권력을 잡았다. 그런 것이 영원히 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 ‘전승불복’이란 것입니다. 그러니까 권세가 있을 때 내가 힘이 있을 때 그때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요? 내가 성공(승리) 했을 때 유혹이 많잖습니까? 힘이 있으니까 주변 모든 사람들이 막 달려듭니다.

 

어떻게 그 힘을 이용해볼까 하고, 그런데 그 힘 있을 때, 권세 있을 때, 잘못사용해서 사사로이 사용해서 힘이 떨어지고, 권세를 잃고 나서 후회하는 경우를 우리는 항상 보지 않습니까?

돈을 좀 벌어서 부자일 때 검소하게 돈을 사용하지 않으면 어떨 때 후회해요?

 

돈이 영원히 계속 나에게 있나요? 아닙니다. 가난할 때 후회합니다. 평안하고 건강해 병원 한번 안 갔다고 영원히 건강이 좋은 것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평소에 건강관리를 잘해 놔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 휴식도 취하고 해서 몸 관리를 잘해놔야지 건강이 꾸준히 유지되는 것처럼 평소에 적당히 휴식을 취해 놓지 않으면 병났을 때 후회한단 말입니다. 영원히 건강이 나에게 보장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영원히 권력과 부가 나에게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은 내가 힘과 부, 건강을 가졌을 때 그때 미리 준비하고 미리 대비했을 때 영원히 내게 머무르는(지킬 수) 것입니다.

 

‘전승불복’은 동양적 사유 방식이라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승리에 너무 자만하지 마라. 너무 도취하지 말라는 말! 반대로 말하면 실패에 너무 상심하지 말란 말이기도 합니다. 실패 했다고 너무 울부짖을 필요가 없습니다.

 

성공이 반복되지 않는다면, 성공이 영원하지 않다면 모두가 영원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패배(실패)도 영원하지 않은 것입니다. 결국은 실패와 성공은 끊임없이 연결돼서 우주(삶) 속에서 공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손자병법 안에는 뭔가 거시기한 것이 있습니다. 거시기한 삶의 철학이 있습니다. 단순히 싸워서 이겨라 이것이 아닙니다. 2,500년 전에 써진 손자병법이 2,5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가 손자병법을 붙잡고 늘어지는(공부) 이유가 뭐예요?

 

만약에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를 해야 한다고 승리만을 강조하고 있다면 별로 그렇게 감흥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손자병법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전략과 전술을 다루고 있지만 그 전략과 전술이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철학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공에 도취하지 마라. 실패에 울부짖지 마라. 휴머니즘이 있잖습니까? 따뜻함이 있잖아요. 필자는 손자병법의 명성이 바로 이런 삶의 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손자는 계속 주장합니다. ‘전승불복’ 유명한 명제입니다.

 

군대에서 승리는 영원히 반복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而應形於無窮(이응형어무궁)’해야 한다고 합니다. 점입가경이라고 점점 철학적인 이야기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영원히 군대에서 승리란 반복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항상 무궁을 생각해야 한다고 합니다.

 

무궁이라 함은 끝이 없다는 말입니다. 끊임없는 상황의 변화에 나의 모습을 응해야 한다고 주장 합니다. 응한다는 것이 뭐예요? 영어로 말하면 accept입니다. 적응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황이 변하면 변하는 상황에 응해야 합니다.

 

폭풍우가 붑니다. 그 폭풍우에서 살아남는 나무는 어떤 나무입니까? 큰 나무입니까? 뿌리가 깊고 큰 나무라고 폼 잡고 버티다가는 송두리째 뽑혀 나갑니다. 하지만 나무에 비하면 하찮다 할 수 있는 풀 한 포기는 바람에 따라 응하므로 뽑혀나가지 않잖습니까?

 

나무에 비해 약한 그 풀 한 포기가 폭풍우에 안 뽑혀나가는 이유가 바로 적응했기 때문입니다. 무궁한 우주 자연의 질서 체계에 자신을 적응시켰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입니다. 결국은 뭐 한 사람만이 살아남는 것입니까?

 

상황(환경)에 적응한 사람만이, 변한 현실에 유연하게 열린 마음으로 적응하는 겸손한 사람이 전승을 영원히 유지하는 방법이라고 손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적응이란 말과 관련하여 다른 례를 하나 더 들어 각론 합니다.

 

‘入鄕風俗’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 지방에 들어가면 그 지방 풍속을 따라라. 시쳇말로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고 동네 들어가면 그 동네 풍속을 따르라는 말입니다.

 

‘入鄕風俗’ 결국 이 말은 무궁한 변화에 내 모습을 응하는 것입니다. 적응시킨다는 말입니다. 변화된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내가 과거에 누구인지 알아! 옛날에 내 권세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아! 라고 말 할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과감하게 자기를 상황에 따라 변화(적응)시킬 때 무궁(영원한)한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중국 공산당 비사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이 ‘팽시’라는 젊은 운동가가 있었습니다. 1921년 중국에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 공산당이 창립됐을 때 광동성에 농민운동을 하겠다고 들어갔습니다.

 

농민운동을 하겠다고 들어가 농민들에게 여러분들! 저를 좀 주목해 주십시오. 라고 말을 하는데 아무도 주목을 하지 않고 다 도망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농민에게 왜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 것이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보시오. 당신 옷차림을 보시오. 목에 머플러를 매고, 배우고, 있는 사람이나 쓰는 중절모를 쓰고, 귀한 고무신을 신고 있는 모습을 보면 무슨 탐관오리가 세금 걷으러 온 것 같은데 누가 당신 말을 듣겠습니까?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밀짚모자를 쓰고 농부들이 입는 평범한 옷에 담배 쌈지하나 메고 맨발로 농민들에게 다가 갔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다시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당신이 말하는 말뜻이 뭔지 하나도 모르겠오.

 

그러니까 자기는 대학생으로 높은 지식적 수준으로 말을 했는데 농민들이 그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이 하는 말은 우리 농민들 수준에서 어려워 무슨 말인지 모른다. 즉 우리들(농민) 언어로 말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언어를 농민들 언어로 바꿨습니다. 그래도 안 돼서 또 물어보니까 당신 혼자 그렇게 다니면 아무래도 거리감이 있으니 낯익은 사람들하고 같이 다니면서 소통을 해보라고 합니다.

 

결국 옷도 농민의 옷으로 갈아입고, 말투도 농민의 말투로 쓰고, 다니는 사람도 농민들과 같이 다니고 하니까 농민들이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 옛날 새마을 운동할 때 이런 얘기들 많이 있잖습니까?

 

그래서 1923년 당시 10만 명 정도의 농민 단체를 만들어 굉장히 큰 활약을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결국은 전승은 영원히 반복되지 않는다. 그러니 무궁한 상황의 변화에 나의 모습을 적응시키고 그야말로 마을(상황)에 들어가면 그 마을 풍속에 내가 적응했을 때 진정한 승리를 할 수 있는 것이고 그 승리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라고 합니다.

 

손자는 잘 사용(주장)하지 않는 말(논리)을 합니다. ‘五行無常勝(오행무상승)’, 재밌는 말입니다. ‘오행무상승’ 손자병법에 이런 굉장히 철학적이고 추상적인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에 주목 해야 합니다.

 

지금 논리가 어떻게 진행됩니까? 전쟁에서 승리는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 아니다. 결국 무궁한 상황 변화에 내 모습을 적응시켰을 때 전쟁의 승리가 유지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오행과 같다고 합니다.

 

오행! 우주 만물을 이루는 다섯 가지 원소 금(金), 수(水), 목(木), 화(火), 토(土)를 이르는 말입니다. 목(木) 나무잖습니까? 나무는 무엇을 이기죠? 나무는 흙을 이깁니다.

 

흙에서 무엇(양분)을 뺏어냅니까? 그럼 흙(土)은 무엇을 이겨요? 물을 쫙 빨아 내 이기죠, 물(水)은 불을 끕니다. 불(火)은 또 뭘 이겨요. 쇠를 녹이죠. 쇠(金)는요 나무를 이깁니다.

 

결국은 뭐예요 금, 수, 목, 화, 토 오행 중에 최고로 싸움 잘하는 놈이 누구입니까? 없단 말입니다. 결국 물고 물리는 것입니다. 먹히고 먹는 것이 오행이며 오행 례를 들어 우주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우주 요소인 오행은 어느 하나가 항상 이기는 존재가 없단 말입니다. 나무가 토를 이기면 그 다음에요 쇠는 나무를 이긴단 말입니다. 나무를 도끼로 찍어내니까요. 화(火), 수(水), 목(木), 금(金), 토(土)의 오행(五行)이 운행(運行)함에 있어서, 서로 조화를 이루는 서로 충돌하는 ‘相生相剋(상생상극)’을 한단 말입니다.

 

四時(사시), 봄, 여름, 가을, 겨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춘하추동 사시도 뭐가 없습니까? 上位(상위)가 없습니다. ‘上’이라는 것이 뭐예요? 영원한 자리가 없단 말입니다. 영원히 봄이 계속되지 않단 말입니다.

 

결국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순환합니다. 단장이 있단 말입니다. 해의 길이가 길고 짧음에 따라 하지가 있고 동지가 있고, 달도 사생에 따라 그믐과 보름이 있잖습니까? 달도 차면 기울고, 해도 길다 짧았다 하며, 춘하추동, 오행(금목수화토), 우주 만물 모든 것은 영원한 승자가 없습니다.

 

이 말을 들으면서 필자는 손자가 쓴 손자병법이 전쟁과 관련한 이야기를 한 책이니까 이기고 지는 이야기만을 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굉장한 삶의 철학과 우주 자연에 대한 자신의 어떤 거시기 한 이해도(철학)를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전승불복’을 주장하는 것은 군대에서 승리는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만. 장자라는 책 있잖습니까? 장자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장자가 하루는 밤나무 숲에 갔습니다. 밤나무 숲에 들어갔더니만 까치 한 마리가 후드득 날아오더니 장자의 머리를 툭 치고 앞에 있는 나무에 앉는 것이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장자가 까치를 보니까 크기도 크고 살도 아주 통통하게 먹음직하게 생긴 실한 까치였습니다.

 

그래서 까치를 잡으려고 돌멩이를 집어 들어 까치를 향해 던지려고 하는데 갑자기 옆 나무에서 매미가 울고 있단 말입니다. 매미는 아주 소리를 높여 맘껏 울고 있는 것입니다. 즐거워서 노래하는 것인지 슬퍼서 우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매미 뒤에는 당랑(사마귀)이 매미를 노려보고 있는 것입니다. 당랑(螳螂)은 사마귓과의 곤충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사마귀를 말합니다. 울고 있는 매미 뒤에 사마귀가 매미를 잡아먹으려고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마귀 뒤에 가만히 보니까 까치가 사마귀를 잡아먹으려고 하고 그 까치 뒤에 누가 또 있어요? 장자가 돌멩이를 들고 있는 것입니다.

 

장자는 이 순간(상황)을 보면서 세상이라는 것이 영원한 승자가 없구나! 라고 감탄합니다. 매미를 잡아먹으려고 하는 사마귀는 아마 자기가 승리했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마귀 뒤에는 까치가 승리에 도취됐을 것이고 또 그 뒤에는 누가 있어요. 장자가 있던 것입니다.

 

이 상황을 본 장자는 느낀바 영원한 승자는 없다는 생각에 돌멩이를 내려 놨습니다. 그런데 장자 뒤에서 누가 머리를 탁 치는 것입니다. 밤나무 주인이 이 놈 밤 훔쳐간다고 하면서 호통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이룬 승리에 대해 도취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 난 승리했다, 성공했다고. 하지만 그 승리 뒤에 또 다른 승자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잊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에는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습니다.

 

앞에서 각론(주장)한 것처럼 내가 이룬 성공에 도취돼서 자만할 필요도 없고, 패배했다고 해서 상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여러분들! 진정 이 시대에 성공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돈 많이 벌고 돌아가신 정주영 회장, 김우중 회장입니까?

 

과거 대통령을 했던 Y.S, D.J 이런 분들 다 성공한 분들입니다. 성공한 분들 맞습니다. 하지만 영원한 승리를 하셨을까요? 필자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승리라고 하는 것, 어떻게 보면 단순하게 승리했다 성공한 삶이다. 고 말 할 수 없습니다. 저 시골에서 이름 없이 자녀들 키우기 위해서 밤낮으로 손가락이 휘도록 농사일 하다가 그야말로 이름 없이 돌아가신 그분들은 삶을 실패한 분들일까요?

 

결국 성공과 실패라고 하는 것을 필자는 손자병법을 토파 하면서 자꾸 승리해라, 승리하라는 관점에서 주장(각론)하다가 오늘 주제인 ‘전승불복’을 토파하면서 손자가 한 이 말에 아주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정말 기가 막힌 말을 손자는 했습니다. 영원한 승리는 반복되지 않는다. 결국 그 승리는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다. 해와 달이 차고 지듯, 사시가 때가 되면 순환하듯 영원히 무궁한 것은 없다는 손자의 주장에서 손자병법에는 삶의 철학이 있고 따뜻한 인간미가 느껴짐을 새삼 느낍니다.

 

손자병법을 통해서 승리와 패배를 초월한 따뜻한 인간적인 삶을 바라보는 자세를 새롭게 가슴속에 태권도인들은 물론 태권도를 사랑하는 일반인 모두가 간직하기를 소망하며 ‘승리는 반복되지 않는다’에 대한 각론을 마치겠습니다.

 

다음 32강에서는 “손자는 물에서 무엇을 보았는가?”에 대해서 각론 합니다. 감사 합니다.

 

태권도정보연구소 / 청호태권도 / 신성환 관장

 

태권도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http://www.riti.net - 태권도정보연구소
http://www.ctu.ne.kr - 태권도지도자교육

http://www.taekwondoforum.net - 태권도포럼

http://www.moodotaekwondo.com - 무도태권도

金烏 신성환 - 이력보기 ☜ 클릭하세요